가을, 그리고 자전거

속도와 행복의 반비례…세상 구원할 장치
'몸과 마음과 풍경 만나고 갈라서는' 중심
생계수단에서 인연, 삶 등 균형감 상징해

"네가 이동하는 속도를 가르쳐달라. 그러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마"

당황스럽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다. 내게 주어진 것이 남들과 마찬가지로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인데 속도란 것이 무슨 의미일까.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이반 일리치의 질문이 새 계절 초입, 가슴을 싱숭생숭하게 한다.

△ 세상 사는 '적당한 기준'

이반 일리치는 시, 도서관, 자전거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어느 순간 메말라가는 감성과 지성을, '도서관'은 기록과 기억, 사람의 중요성이라고 애써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자전거는 예상외다. 알아서 운전을 해주는 장치까지 등장하는 마당에 힘들여 페달을 밟아야 하고 남에게 내보이기에 어딘지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자전거가 웬 말인가 싶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행어를 따라 '당황하지 말고' 맥락을 읽어 본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속도 경쟁이 행복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 차'를 장만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전 '뚜벅이'일 때 보다 출퇴근 시간도 짧아지고 원하는 곳을 골라 갈 수 있다. 대신 훨씬 큰 삶의 몫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것을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자동차를 사고, 기름값을 대고, 보험료와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노동시간과 소비의 엄청난 부분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그 강도도 다르다. 도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야 세금으로 공평하게 충당한다지만 혼잡 비용은 서민에게 전가된다. 쾌적한 환경이나 좋은 직장은 점점 멀리 옮겨가고, 그 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점점 더 유리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자전거는 들기 쉬운 예일 뿐이다. 일리치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보편적 행복을 위한 '적정한 기준'이다. 일리가 있다. 자동차와 비교해 생태·환경오염이 덜하고, 속도 지상주의에서 자유로우며 건강을 회복하는 이동수단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 길 위에 서다

자전거 얘기를 하며 소설가 김훈의 '풍륜(風輪)'을 빼놓으면 어딘지 헛헛하다. 자전거를 너무도 사랑해 전국은 물론 발 닿는 곳 모두를 두 바퀴로 누볐던 이의 말이 새삼 귀에 박힌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왜 차를 타고 가면 모르나 싶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몸과 마음과 풍경이 만나고 또 갈라서는 그 언저리'에서 '모국어가 돋아나는'시간의 차이다. 숨 한 번 돌리며, 천천히 보는 관찰의 힘이 다르다. 한 송이 꽃이 피고 지는 소리를 듣고, 2만5000분의 1 지도 위 노인의 실핏줄 마냥 힘겹게 버티고 있는 우마차로와 소로, 임도, 등산로에 연신 발을 구른다. 출발할 때의 두근거림이 진한 땀과 격한 호흡으로 바뀌고 가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지경에서 멈춘다.

두 바퀴가 달리는 것은 곧고 빠른 단축의 길이 아니다. 느리고 질긴, 굽이치고 돌아드는 길들이 추억을 건들고 기억으로 남는다.

소설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본 '그야 말로 겨우 존재하는, 여리고 애달픈 것들. 언 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미는' 쑥을 우리는 재래시장의 플라스틱 소쿠리나 대형매장 봄 특별전 코너에서 겨우 본다.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만 남을 일이지만 그 것을 받아들이면 연륜이 남는다. 연륜이 '륜'은 바퀴다.

△ 따뜻한 연결 고리

자전거가 만드는 연결 고리는 따뜻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시간의 흐름을 대신하고, 특별한 복선을 만든다. 몇 번이고 숨을 삼키게 하는 롱테이크(Long take)일 때가 많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Life is like riding a bicycle to keep your balance, you must keep moving)'는 말을 스크린에 담아 놓은 듯한 느낌이다. 국경도 없다.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는 생계수단으로 등장해 불평등한 현실과 인간애를 얘기하는 장치가 된다. '천국의 아이들'에서 일을 찾아가는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자전거에 태운다. '첨밀밀'에서 자전거는 일과 인연을 상징한다. 연인이 헤어지고 녹이 슬어가는 자전거가 오버랩 된다. '러브레터' 속 자전거는 마치 여주인공 마냥 연기를 한다. 나폴리 바다가 어느 영화보다 아름답게 그려졌던 '일포스티노'에서 단 한 사람을 위해 늘 편지를 배달하는 포스티노(우편배달부)는 자전거를 탄다.

'인생은 아름다워' 속 자전거는 가족을 연결하는 매개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두 주인공은 자전거 때문에 우연히 만난다. '파랑주의보' 속 어린 연인은 섬을 따라 자전거 데이트를 하며 풋풋한 청춘을 풀어낸다. '로마의 휴일' 속 앤 공주의 자전거는 자유였다.

뭐가 됐든 단순히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정말 의미 있게 사는 장치로 자전거를 보자. 행복이 숨 쉴 틈이 보인다. 그렇게 드르륵 두 바퀴를 타고 가을이 온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