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까지 벌초 행렬 절정…"효(孝)의 생생한 현장교육"
자신의 뿌리와 가족의 의미 되새기는 의미있는 수고로움

제주의 들녘이 인파로 출렁인다. 벌초의 계절이다. 벌초행렬은 음력 8월 초하루인 오는 20일과 그 주말에 절정을 이룰 전망이다. 육지, 해외로 흩어져 살던 가족과 친척들은 오랜만에 가족·문중의 묘소에 모여 정성껏 풀과 잡목을 베고 함께 절을 올린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뜻에 더해 희미해져가는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제주의 각별한 벌초문화

'추석 전이 소분 안호(아래아)민 자왈 썽 멩질 먹으레 온다' '식게 안 한(아래아) 건 놈 몰라도 벌초 안 한(아래아) 건 놈 안다'

제주에서는 벌초(伐草)를 소분(掃墳)이라고도 한다. 무덤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뜻이다. 

전국적으로는 풀의 성장이 멈추는 백중이나 처서 이후, 제주에서는 8월 초하루부터 추석 전날까지 주로 행해지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이지만 제주에서는 더욱 각별하게 여겨져왔다.

추석까지 벌초를 안하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 먹으로 온다거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남들이 몰라도 벌초를 하지 않으면 표시가 난다는 속담에서 벌초의 중요성이 능히 짐작된다.

자식들이 멀쩡히 살아있어도 벌초를 게을리 하면 '죽은 아방 곡두에 풀도 안 그치는 놈!'이라며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른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육지에 나가 살더라도 벌초날 만큼은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다. 사정이 안되면 점심값이라도 들려 보내야 마음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심지어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은 빠듯한 형편 탓에 명절이나 제사에는 못오더라도 벌초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인식해 전세기가 오갈 정도였다.

도내 학교들도 "학생들이 벌초에 참석하는 것이 곧 효(孝)의 생생한 현장교육"이라며 대부분 음력 8월1일 벌초방학을 따로 줬지만 오늘날에는 점점 사라져가면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공동체 의식 재확인

제주의 벌초는 크게 가족벌초인 '가지 벌초' 문중벌초인 '모둠벌초'로 나뉜다.

가지벌초는 8촌 이내의 친척들이 모여 고조부 묘까지 벌초하는 것이다. 웃대벌초로도 불리는 모둠벌초는 묘제나 시제를 하는 윗대조, 즉 제사를 지내지 않는 조상의 묘소에 친척들이 모여 벌초하는 것이다.

모둠벌초는 주로 음력 8월 초하루에 행해왔지만 주중에 짬을 내기 어려운 요즘에는 초하루를 낀 주말을 택해 벌초에 나서는 경우가 흔하다.

적게는 수명에서 많게는 수십명의 친족이 모여 하루 온 종일 10~30여기의 묘소를 벌초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주에서 벌초가 유달리 강조되는 것은 특유의 공동체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문중 자손들이 모여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재확인한다. 무엇보다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묘소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 효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또 타 지역에 비해 문중조직이 약했던 제주에서 벌초는 일종의 수눌음 성격이 강했다. 자동차나 예초기가 없던 시절, 한 사람이 빠지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양의 벌초를 해야 하기 때문에 피해를 주는 일이었다.

반면 벌초를 못한채 방치하면 후손이 끊겨 버려진 '골총' 취급을 받았고, 요즘에는 오랜 기간 방치할 경우 무연고 묘지로 정비대상이 될 수 있다.

△시대변화로 신풍속도 등장

오늘날에는 도시화와 핵가족화라는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벌초문화도 예전같지는 않다. 

바쁜 사정에 한날 한시에 모이기가 쉽지 않고, 장묘문화도 매장보다 화장이 60%를 넘을 정도로 자리잡았다.

결혼·출산이 줄면서 자손까지 귀한 시대가 되다보니 조상묘는 고사하고 가족묘 관리도 벅찬 가정이 많다. 생업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벌초 대행서비스가 등장해 활기를 띠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흩어져 살던 부모형제·친척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땀 흘리는 일 자체가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고,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기회다.

특히 제주의 묘지는 타 지역보다 크고 산담에 둘러싸여 더 많은 정성과 손길이 필요하다. 오름 중턱까지 헉헉 대며 오르는 일도 다반사지만 들인 수고만큼 가족애도 돈독해진다.

제주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세시풍속인 벌초는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주문화원의 조사를 보면 도민 10명중 7명이 지역·종교와 무관하게 벌초를 자랑스러운 제주문화로 지켜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연령별로는 60대 이상 80%가 긍정적인데 반해 20대는 42%에 머무르는 점은 앞으로 제주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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