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같은 계절, 중독성 강한 '걷다'의 매력
사람다움 깨닫는 배경 따라 감성.호흡 회복
'동네서점'붐, 작은 문화 공간 숨 쉴 여유로

밤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진다. 긴 팔 겉옷을 꺼내고, 따뜻한 차와 재즈 음반, '노르웨이숲'의 향수를 챙긴다. 겉멋 같은 것을 내려놓고 보면 너무 더워서 챙기지 못했던 골목이 가까워지는 계절이다. 골목은 마치 카페인처럼 좀처럼 끊을 수가 없다. 집 근처를 걷다 우연히 코끝을 쥐고 흔든 커피 향에 취해 작은 찻집을 냈다는 어느 영화감독의 사연이나 30여 년간 비어있던 오래된 잡화점에 숨어든 3인조 좀도둑이 '사람다움'을 깨닫는 기적의 배경에는 골목이 있다.

책을 읽다 길을 잃다

'책을 읽다 길을 잃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가슴 떨리는 말이 또 있을까. 풋내 나는 첫 고백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가슴 밖으로 뛰어나오려 애를 쓰고, 손발이 저절로 떨린다. 문학소녀라 자처하며 하루키의 일상을 흉내 내느라 진한 커피를 앞세워 새로운 여행지를 찾는 상상도 해봤고, 김 훈의 단문에 빠져 원고지를 뭉텅이로 사들이고 굳이 연필을 깎아도 봤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미아(迷兒)가 된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순간 마음이 통하거나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문장은 복잡한 골목길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한다.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 앞에서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낫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고 또 걷는다. '걷다'는 동사가 주는 어감이 달다. 정처 없이 걷는 얘기일 수도 있고, 줄거리에 빠져 쉴 새 없이 책장을 걷는 일일 수도 있다. 작가가 수집한 상상과 감성을 아낌없이 걷을 수도 있고 정신없는 일상에 덧없이 쌓인 번민을 걷어낼 수도 있다. 골목에서 시작한 감수성의 타래는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풀린다.

△제주 동네서점의 힘

굳이 골목이 아니더라도 가을을 찾을 곳은 많다. 그래도 골목이다. 그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사람 사는 이유를 만들어가는 공간이 그럴 이유가 된다. 

동네 서점만 놓고 봐도 안다. 동네서점지도 인덱스의 데이터 통계 분석 자료(2015년 9월1~2017년 7월31일)~를 총 257곳의 작은 서점이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이중 올 들어 문을 연 동네책방만 31곳(19.1%)이다.

전국 상황이라 보기에 서울?경기 등 수도권(61.5%)을 제외한 지역 중 제주는 부산(5.8%)에 이어 두 번째로 동네 서점이 많은 곳이다. 대구와 동률이기는 하지만 상위 두 지역 모두 광역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역 면적이나 인구 대비 동네서점 비율은 단연 제주가 1순위다.

행복하게도 하늘에 별이 있다면, 동네에는 서점이 있다. 그만큼 소중하게 빛난다. 독립서점 10곳 중 3곳 이상이 독립출판물을 취급하고, 커피 같은 기호품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여행객에게 정보와 편의를 제공하는 여행 전문 서점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하는 '북스테이', 자신이 사는 집의 일부 또는 사무공간을 서점으로 공유하는 가정식 서점과 실험서점 같은 새로운 시도가 골목을 헤매는 즐거움을 더한다. 독서모임이나 북콘서트 물론이고 그림책만들기나 드로잉,일러스트 등의 워크숍, 아트북페어 등 지역 주민과 창작자 사이를 잇는 창구 기능까지 한다. 그래서 참 예쁘다.

△보이는 것이 삶이고 가을

누군가 어깨를 살며시 흔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 잘 차려입은 토끼가 정신없이 뛰어 다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가 했더니 눈앞에 노란 벽돌길이 펼쳐지고 엘튼 존의 'Good bye yellow brickroad'가 무한반복된다. 이번엔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다.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 지나가고 "남자사랑 하나 바라보고 나 자신을 포기할 만큼 , 그렇게 사랑하진 않아"를 외치는 혜완('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옆에 서 있는 나를 본다. 그리고 다시 내가 일상적으로 뱉은 말, 생각, 우발적으로 쏟아낸 것들이 누군가에겐 상처로 차곡차곡 쌓이는 건 아닐까를 반문하며 누구도 아닌  '82년생 김지영'과 마주한다.

길고도 긴 골목이다. 어쩌면 골목을 핑계로 계절에 취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작다'는 외형적 느낌을 걷어내고 보면 깊고 풍부한 매력으로 채워진 공간이 무궁부진하다. 애써 책을 동행했지만 그 곳에 찾는 것이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가을이 그리 하라 한다. 차는 세워두고 늘 급했던 호흡을 원래로 돌린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하면 보이는 것이 삶이고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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