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왕관릉 단풍.

"가을입니다/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윗녘 아랫녘 온 들켝이/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불빛을 찾았습니다/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작은 흙길에서/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당신께 드립니다"(김용택 '가을'중)

가을이 익어간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풀벌레 소리로 시작해 색깔로 완성되는 제주의 가을이다.

가을의 색은 찬 바람에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이 먼저 알려온다.

도심속 하나 둘 떨어지는 샛노란 은행나무 잎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귀띔하면 먼 발치에서는 알록달록 오색찬란한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발길을 유혹한다. 설악산과 오대산 등 전국이 빠르게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단풍을 즐길 수 있는 한라산의 단풍은 이달 26~29일께 절정에 이른다. 11월 중순까지는 가을이 머물다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올 가을 단풍은 특히 어느해보다 진하고 고운 빛깔을 드러낸다.

나무들이 자연이 준 빛깔을 제대로 뽐내려면 기상조건의 도움이 필요한데, 올해는 충분한 햇빛과 낮과 밤의 온도차, 촉촉한 가을비로 적당한 수분을 머금는 등 이런 조건들을 두루 갖춘 가을이 됐다.

어느 해보다 짙고 화사한 단풍을 기대해도 좋다.

수많은 화가와 사진작가들의 영감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해온 억새도 빼놓을 수 없는 제주의 가을색이다. 이맘 때면 섬 전체가 억새 천국이다.

빛나는 가을색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오름을 찾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여왕처럼 풍만한 품으로 사람과 억새를 품어주는 따라비오름과 새별오름, 산굼부리 등은 이름난 억새 명소로 인파가 몰린다.

오름과 들판에 펼쳐져 출렁이는 억새의 바다는 고독보다 희열을 느끼게 한다. 사람이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깊은 탄성 뿐이다.

억새는 색깔도 다양하다. 가까이서 보면 하얀색이나 연보라색에 가깝지만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꽃들이 가을 햇볕에 물결을 이루면 눈부신 은빛으로 빛난다.

억새 위 배경으로는 가을답게 높은 하늘이 짙은 푸른색으로 청량감을 더한다. 빌딩숲 도심에서는 온전히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광활한 하늘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발 아래로는 하얀 억새꽃이 넘실거린다.

억새의 색깔은 바라보는 시간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진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파도처럼 군무를 추는 화창한 한낮의 억새에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 해질 무렵 노을빛 아래 곱게 물들어가는 인생의 황혼을 떠올리게한다. 차분하고 사색적이다.

아쉬운 마음에 지나온 길을 한참 바라본다.

억새가 바람에 쉽게 흔들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부러지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 투성이인 세상이다. 조금 흔들려도, 끝내는 꺾이지 않고 제 자리를 함께 지켜내고야 마는 억새의 지혜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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