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목마

말의 수호신 '방성' 임하는 곳…역사 속 관련 기록 가장 많아
섬 닮은 수더분한 몸체와 둔한 곡선, '회복' '여유' 아이콘으로

'아 벌써'소리가 절로 난다. 분명 새해 첫 해에 소망을 빌고, 더웠던 여름에 정신을 팔았던 것 까지 기억이 나는데 올해 달력은 이제 겨우 두 장만 남았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빨리 자라면 그만큼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되는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안절부절 갈피를 잡기 어렵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그게 뭐든 대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계절병 같은 조급증을 앓다 잠깐 숨을 돌리는 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느리게 움직인다. 그렇게 보인다.

# 한가롭다의 기준

제주 중산간의 시간을 따라간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뭔가가 딱 하고 맞아떨어진다. 지금은 '고수목마'의 때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풍경은 그 고즈넉함과 절묘한 색감으로 제주를 대표하는 영주십경 중 하나로 꼽혔다.

'한가롭다'는 것은 사실 보는 사람의 기준이다. 지금이야 좋다는 것들이 쏟아져 비옥한 땅 얘기가 쉽지만 제주의 밭은 대부분 한 번 농작물을 수확하고 나면 연작을 할 수 없을 만큼 박했다. 자연적으로 땅의 기운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시간은 늘 더디다. '쉬돌림(밭을 쉬게 하는 일)'하는 동안 옛날 제주 사람들은 말이나 소를 그 안에 몰아넣었다. 어슬렁 어슬렁 밭 여기 저기를 돌며 마음껏 생리현상을 하도록 둔다. 그것들이 거름이 돼 땅의 기운을 북돋우는 일을 바령이라고 했다. 테우리들에게 겨울을 제외한 봄과 여름, 가을 바령은 때를 가늠하는 기준 역할을 했다. 바령밧이 정해지면 테우리들이 저마다 말을 빌려 한데 모은다. 보통 150~170마리가 모이는 '바령테'는 해가 있는 동안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풀을 뜯고, 해가 지면 밭에 모여 밤을 지샌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소리로 단단히 지키고 있는 '워려려려허 허허러러'하는 말 모는 소리가 한라산 허리를 누빈다. 행여 말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신경이 곤두선 테우리들에겐 힘든 시간이고, 말 입장에서는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수동의 시간이다. 마치 사람 사는 일처럼 저마다 입장차가 있고, 각각의 시간이 흐르고 도움을 주고 받는다.

# 닮고 또 닮아가고

전국 어디에도 제주에서처럼 가까이 말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없다.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낸다'는 말이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터다. 오래 부대끼다보면 닮는다고 제주말은 제주사람을, 그리고 섬과 비슷하다.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바다 건너 출신의 말들이 유연한 선을 자랑한다면 제주에 지천인 말들은 한마디로 뭉툭하다. 키라고 해봐야 1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에 머리까지 크다. 세상 때 묻은 것은 한 번도 보지 않은 듯 선한 눈매에 막 입어도 좋은 '일바지'마냥 편한 느낌이 난다. 어딘지 둔해 보이는 곡선은 섬의 표정이 되고 때로는 품 안으로 이어지는 오름 능선과 비슷하다.

제주에 말이 언제부터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제주의 역사를 말하면서 '말(馬)'을 빼놓으면 어딘지 서운하다. 제주는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이 임하는 곳이라 불렸다. 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말뼈가 나오는 것에서 그 시작을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탐라에서 고려로 말을 바쳤다는 기록들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에서도 제주 관련 내용 1760건 중 '말'을 가장 많이 언급했다. 공마·세공마·마정·감목관·목장·고득종·김만일 등 말(馬)과 관련 내용도 280건이 확인됐다.

# 허허러러 잠깐 쉬자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는 남원읍 의귀 출신 김만일이 제주마(濟州馬) 500마리를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탐라순력도에는 '공마봉진(나라에 필요한 말을 고르다·숙종 28년 1702년)'이라 하여 나라에 필요한 말을 보내기 위해 각 목장에서 고른 말들을 제주 목사가 최종 확인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말은 그렇게 제주의 척박한 환경과 끊임없이 이어지던 외부의 간섭과 연결된다. 제주 항해술이 발달한 배경 중에는 '말을 제대로 진상하기 위한'목적도 있다.

그런 말을 기르기 위해 한라산 허리를 두 번이나 감아가며 쌓아올린 잣성(말을 기르던 목마장 경계에 쌓은 담장)은 이제 걷는 길과 연계한 문화관광 상품이 됐다.

산다는 것이 그렇다. 시작할 때는 남보다 크고 좋은 것에 눈이 가지만 어느 순간 곁눈질을 하고, 한없이 앞 선 그림자에 낙담하게 된다. 어떤 위치에 어떻게 있을지 정해지지 않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불현 듯 말의 계절을 부르고, '삶'이 뭔가 시덥지 않은 얘기를 풀어내는 걸 보니 잠깐 쉬라는 신호인가 보다. 그러니 더 한가로워 보이는 '고수목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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