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항파두리

항파두리 항몽순의비.

자유·희망의 땅 제주…민심으로 웃고 울었던 항쟁사
100년 몽골 지배 등 외세 침략의 역사 시작점 '아픔'

바람이 분다. 한순간 천지가 뒤집을 듯 와와 일어서는 함성이 귓가를 때린다. 끊이지 않는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선 이들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 바람이 불고 불어 자유독립을 위한 의지를 묶었고,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역사 앞으로 이끌었으며, 촛불을 밝혔다.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움켜쥔다. 서성이는 발길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750년 전 역사와 마주하는 일이 어디 쉬울까. 

△새왕국 세울 신천지

지난 2009년 12월 1일 일본 오키나와현 나와시 국립극장에 '삼별초'가 섰다.

"어디로 가는가. 새 왕국을 세울 신천지가 어디에 있는가. 오랑캐 말발굽소리 들리지 않는, 새 고려는 어디인가. 큰 배를 타고 남으로 가면, 거기 신천지가 있다는데…. 가자. 망망대해 배를 띄워라!" 

전남 진도군 주민들이 직접 연기한 뮤지컬 '구국의 고려전사 삼별초'다. 진도에서 패한 삼별초 병사와 진도 주민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삼별초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 그 희망의 땅은 '제주'였다 여겨진다.

고려왕조는 1231년 몽골군의 고려 침략 이후 40년간 항전했다. 한 때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야간 치안을 담당했던 이들과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친 병사들로 구성된 신의군이 힘을 합치면서 삼별초가 완성됐다. 고려가 1270년 원나라와 굴욕적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한 뒤 해산 명령을 받은 이들은 조용히 뭉쳤다.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반란'이지만 삼별초에게는 목적이 분명한 항쟁이었다.

장군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反)개경정부의 깃발을 올렸다. 거점이던 강화성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에 1000여 척의 배에 나눠 몸과 짐을 실은 삼별초가 닿은 곳이 전남 진도였다. 바람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의 취약점을 노린 해도입보(海島入保·섬에 들어가 안전을 확보함) 전술이었다. 이들의 기세를 꺾은 것은 고려 개경정부와 원의 연합군 6000여 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장군과 왕을 잃은 삼별초에게 제주는 역사와 의지를 지킬 보루였다.

△격전 상징하는 이름으로

제주 땅을 밟은 삼별초는 장군 김통정의 지휘 아래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6㎞의 성을 쌓는다.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이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 요새가 다름 아닌 '항파두리'다. 

지금이야 1㎞ 남짓한 토성과 성이라 여겨지는 흔적들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 때 삼별초는 700여명의 병력으로 여원 연합군 1만2000여명에 맞섰다. 비극적인 결말을 남기기는 했지만 항파두리성은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원에 맞서 치열한 항몽전을 펼쳤던 삼별초의 격전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삼별초의 역사는 여기서 끝맺음하지 않았다. 1994년 오키나와 우라소에(浦添) 시의 우라소에 성과 우라소에 요도레(성의 암벽을 파서 만든 왕실의 무덤)에서 흥미로운 기와가 대량 발굴됐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계유년에 고려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암키와였다. 이 수막새는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의 제작기법이나 형태가 동일했다. 일본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 계유년은 1273년일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이 나왔다. 1271년 이후 진도와 제주에서 패전한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1273년에 고려식 기와를 만들고 건물을 지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학자들 중에서는 류큐왕국 건설에 있어 삼별초가 세력의 집단화와 공동체의 의미를 전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민심 없이는 뜻 이룰 수 없다 교훈

하지만 '삼별초'라는 이름은 제주에게는 '아픔'이다. 삼별초가 무너진 후 몽고는 제주에 탐라총관부라는 직속기구를 설치하고 지배한다. 제주를 거대한 목마장으로 삼아 100년 동안 직할령으로 직접 통치한다. 몽고의 영향을 받은 생활습관이나 문화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며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외세의 끊임없는 침탈에 시달려야 했던 역사는 이미 시작됐다.

몽골에 이어 왜구의 빈번한 침입에 시달렸고 한말 일본 어업인들의 수탈과 해방 직후 4·3사건 등 외세의 압력에 휘둘리게 됐다.

칼과 창은 삼별초가 들었지만 그들을 지지하고 지원한 것은 다름 아닌 제주인들이었다. 

제주는 1105년 탐라국이 해체되면서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이들의 폭정은 제주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밭과 밭의 경계를 구분하는 '돌담'이 이 시기 시작됐다는 얘기도 있다. 삼별초가 제주에 오기 전 크고 작은 민란이 이어졌을 만큼 민심이 흉흉했다. 몽고에 반대하는 반외세, 몽고와 강화했던 고려 정부에 대한 반정부 노선을 분명히 한 삼별초의 등장에 민심이 끌린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방어 시설의 구축, 선박의 건조, 군량 확보 차원에서 무리한 약탈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고,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이런 양면적 평가는 오늘에 이르러 역사를 읽는 다양한 접근법과 이해로 해석된다. 삼별초 최후의 거점인 '항파두리'를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망명정부의 도성(都城)으로 축조기법 등에서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하는 이도 있다.

그 곳에 다시 깃발이 올려진다. 그것이 '민심을 바로 읽으라'는 주문인지, 많은 이들이 역사를 마주하는 길안내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바람을 마주하고 다시 귀를 세워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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