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반년간 피고 지는 꽃
4·3 기억하는 상징물...풀지못한 제주사의 반성으로

'가장 눈부신 순간에/스스로 목을 꺾는/동백꽃을 보라/지상의 어떤 꽃도/그의 아름다움 속에다/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함께 꽃피우지는 않았다/모든 언어를 버리고/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허공에 한 획을 긋는/단호한 참수' (문정희 '동백꽃' 전문)

SNS에 어느 순간부터 동백꽃이 피었다. 슬슬 겨울이 왔다는 신호다. 찬 바람에 손발이 시린 계절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듯하다는 남쪽 섬 땅을 붉은 동토(凍土)로 만들었던 겨울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는 제주만의 계절 '동백철'이다.

△ 「동백꽃 지다」의 추억

언제부터 동백철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아하고 고운 자태에 마냥 마음을 맡길 수 없음을 뜻하는 아픈 말이기도 하다.

어느 해부터인가 제주4·3을 말하는 자리에 '동백꽃'이 피었다. 식물도감을 보면 이르면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핀다는 것들이다. 제주에서는 담장에 장미 넝쿨이 감겨 있는 것 보다 동백꽃을 보는 것이 더 익숙하다 할 만큼 지천이다. 사시사철 꽃 없는 달이 없는 제주에 반년 이상을 피고 지는 것들에 과연 몇 번이나 눈이 갈까. 그럼에도 동백꽃이 피면 습관처럼 신열이 나고 이유 없이 앓는다.

동백과 4·3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른다. 처음 알게 된 것은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였다. 한국 근·현대사를 국사 교과서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찾았던, 4월이면 대학가 곳곳에 검은 천이 걸리고 향이 피워지는 것을 곁눈질 했던 이에게 4·3은 동백꽃으로 왔다. 대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잠들지 않는 남도'의 첫 가사처럼 "꽃잎 시들었어도/살 흐르는 세월에/그 향기 더욱 진하리…"하고 섬을 붉게 태웠던 것이 아마도 동백 아니었을까 했던 것은 그 후로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먼저 저버린 것들을 기억하며

다시 동백철의 한가운데서 선홍의 기억에는 '툭'하고 꽃이 피고, 다시 진다. 그 사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점성이 생긴다. 마치 온몸에 산소를 풀어놓고 덕지덕지 이산화탄소에 휘감겨 짙어진 피의 느낌이다.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은 쉽게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감을 한껏 끌어올려 그 안의 것을 끄집어낸다.

회색의 계절, 갈색으로 말라버린 것들 사이 돌담이며 짙푸른 상록수 잎들로 어둑해진 분위기에 붉은 꽃잎은 더 붉어지고 샛노란 꽃술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려해 보이는 그 것의 뿌리 끝에는 까닭 없이 가장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툭하고 먼저 저버린 것들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는 봄이 오는 길목에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먼저 오는 것들이지만 아직 돋지 못한 순들 사이 꽃봉오리 시들 여유도 없이 지는 것들이 남긴 붉은 감탄사를 시인은 들었을까. 단호하기까지 한 '참수' 의식에 더 이상 방관자로 남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4·3을 기억하고 기록하다

올해 동백꽃은 결코 지지 않을 기세다. 매월 4월 끝물처럼 피어오르던 것들이 일치감치 피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4·3을 기억하는, 기록하는, 상징하는 모든 것들에 '동백'이 새겨진 까닭이다.

어쩌면 동백은 길목을 지킬 뿐 한해 피고 지는 모든 것들이 4·3을 가리킨다. 들꽃에서 지난 역사를 읽었던 시인의 시선을 따라 1월 수선화에서 1949년 1월 17일의 북촌 대학살을 떠올리고, 2월 복수초는 제주읍 동부 8리 대토벌을, 3월 매화는 1947년 3?1시위를 하고 보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다. 애써 지우고 잊으려 하지만 않는다면 한해를 통틀어 '동백철'이라 불러도 무방하단 얘기기도 하다.

4·3을 기억하는 자리에 비교적 자유롭게 불리는 제주 민중가수 최상돈의 '애기 동백꽃의 노래'도 그렇게 사계절을 누빈다. 님 마중 나갔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누이는 처음 하얗게 눈이 내린 들판에 붉게 피는 꽃이었다가 하얗게 안기었다 푸르게 태어나는 봄꽃이 되고, 동서남북 어디에도 뿌리내리는 나라꽃이 되고, 그렇게 다시 피어나는 겨울을 기다린다. 

4·3 70주년이다. '70'은 지나간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반성과 각오를 상징한다. 올 한해를 통틀어 그것들을 품은 적어도 70송이의 동백꽃을 피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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