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2 <3> '시민의 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1907년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고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 경제난 극복과 도심지내 녹지공간 확보 및 시민의 안락한 휴식공간 제공을 위해 조성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정부 아닌 '지역사학' 중심 등재 움직임 공통점
인적·물적 인프라 확충 과제...교류 강화 주문도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시대. '빚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국채를 갚고 국권을 지키려는 불길이 전국에서 일어난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시민들의 노력은 기록으로 남았고 이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통해 세계인의 역사가 됐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사례를 통해 제주4·3의 미래를 설계한다.

△시대적 배경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모든 대륙에서 식민지적 팽창을 하면서 대부분의 피식민지국가에게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우고 그것을 빌미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을 동원한다.

아시아 동북쪽의 작은 나라였던 한국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외채로 망국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미 베트남, 인도, 폴란드, 이집트, 오키나와 등의 국가들도 외채로 나라를 잃은 역사적 사실을 주목했다. 이에 한국 국민은 외채로 인한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다.
한국의 남성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성은 반지와 비녀를 내어놓았고, 기생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민의 약 25%가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한국 사람들은 전 국민적 기부운동을 통해 국가가 진 외채를 갚음으로써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려한 것이다.

국민의 자각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 당시 경기도부터 황해도, 평안도까지 전국에 국채보상소가 운영되는 데 당시 전라도에 편입돼 있던 제주는 신좌면 함덕리에 국채보상소가 설립된다.

△국채보상운동 파급효과 

국채보상운동은 영국 언론인이 한국에서 발행하는 영어신문과 해외 유학생 및 이주민 등이 발행하는 신문 등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특히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을 알림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지게 돼 외채로 시달리는 다른 피식민지국에 큰 자극이 된다.

이후 중국(1909년), 맥시코(1938년), 베트남(1945년) 등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여러 국가에서도 한국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연이어 일어난다.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이후에 일어난 운동과 비교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섰으며 가장 긴 기간 동안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며 당시의 역사적 기록물이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가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적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적 '책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다.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그리고 유럽 등의 외환 위기에서 보듯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누적적 부채 위기를 극복함에 있어서, 국채보상운동이 국민적 연대와 책임의식에 기초한 경제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16년 6월 17일 기획전시실에서 (사)나라얼연구소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및 자료 기증식을 개최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준비과정

전 국민이 참여한 민간 주도의 경제자주권 회복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에서는 2002년 5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를 구성했다.

사업회는 2015년 8월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물 2475건을 선정해 문화재청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한다.

문화재청은 같은 해 11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최종 후보로 선정하고 유네스코 사무국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외채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투에 대해 금연, 절약, 나눔 등을 통한 전 국민의 평화적 기부운동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고 있어 세계사적 중요성, 독창성 등이 뛰어나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대구시와 사업회는 지난 2015년 3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국회 세미나, 대구박물관 특별전, 대시민 보고회, 100만인 서명운동, 전문가 토론회 등을 활발하게 펼치는 등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다.
또 국채보상운동의 발의자인 서상돈 선각자를 기념하는 '서상돈 상'을 제정, 격년으로 운영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지난해 8월 열리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의 심사를 거쳐 같은 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이후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이를 추인하면서 등재가 최종 확정됐다.

△기록유산 등재 어려움

국채보상운동이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는데 가장 큰 난관은 무엇보다 국내경쟁이었다. 기록유산에 대한 인식이 낮을 때에는 경쟁률이 낮았으나, 오늘날에는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경쟁률 또한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이 도전했을 당시 경쟁률은 '13대 2'였다.

국제심사 준비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누구에게, 어떻게' 접근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홍보하고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국제심사 윤리상 개별적으로 이들에게 접근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영어 등 외국어로 된 번역서를 만들어서 홍보를 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 제주4·3에 주는 교훈

제주4·3의 기록유산 등재가 당면과제로 떠오른 지금 국채보상운동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바로 지역이 중심이 돼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했고 성과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새마을운동'이나 등재를 앞둔 '조선왕실 어보·책' 등은 정부가 중심이 돼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광주5·18 기록물처럼 정부가 아닌 민간과 지자체가 직접 나서는 등 기록유산 등재 추진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주4·3도 정부 주도의 기록유산 등재는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 선행사례를 통한 인적·물적 인프라 확충과 교류 활성화 등이 선행돼야 한다.

동면에 빠져있던 제주4·3은 올해 70주년을 맞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제주의 아픔으로 제주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제주4·3이 밝은 빛을 보고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을 때 제주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섬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인터뷰>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전문위원

"제주4.3 기록물이 국내외적으로 비교했을 때 왜 독창성이 있고 창의성이 있는지를 학술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전문위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조건은 독창성과 창의성, 그리고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며 "유사 사례가 엄청 많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어떻게 이를 잘 구현해 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문위원은 "제주4.3은 국내적으로도 아직 논란 중에 있다"며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는 것은 객관적인 연구과 계속적인 홍보가 중요하다. 단 시간 내에 성공하려고 하기보다는 국내적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채보상운동의 기록유산 등재는 자료집 발간과 국내.외 학술 세미나, 전국 순회 전시회 등 철저한 준비과정이 원동력이 됐다"며 "또 그리스 사태 등 부채가 심각한 국제적 문제로 인식된 점 등 국제사회 흐름과 맥락을 같이했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전문위원은 "국채보상운동 정신의 세계화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며 "이제 국내적 의미를 넘어 세계적인 의미와 가치를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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