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창틈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커튼을 활짝 걷었다. 눈 덮인 세상은 온통 은빛이다. 길 건너 꽃망울과 활짝 핀 동백나무 이파리에도 한가득 흰 눈을 이고 있다. 동백나무 가지마다 가득 핀 여러 꽃송이 속을 동박새는 눈을 헤집고 분주하게 주둥이를 갖다 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동백나무 잎들이 눈에 덮여 아래쪽으로 늘어져 있는 이파리들이 눈을 털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순간 사방으로 흩날리는 눈알갱이가 햇빛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반짝인다. 

카메라를 들고 가까운 위미동백나무 군락지에 갔다. 고향은 아니지만 20여 년 만에 눈 밟는 소리가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게 한다. 토종 홑동백나무를 찾았다. 눈 위라 그런지 떨어져 있는 동백꽃 주변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한 송이를 손으로 집었다. 붉고 고운 지나간 청춘과 잃어버린 첫사랑을 보는 듯 샛노란 꽃술은 타는 듯 단아하다. 동백꽃과 추억의 사이로 동박새 한 마리가 포르릉 날아든다. 빨간 꽃잎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술래놀이하나 싶는데 잿빛 부리와 또랑또랑한 눈썹이 온통 노랑 꽃가루가 분장 되어 있다. 그런 줄 아는지 모르는지 분주하게 이꽃 저꽃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동백꽃은 꽃 수정도 나비나 꿀벌이 필요치 않다. 튼실한 동박새면 족하다. 동백꽃과 공생관계로 이런 추운 날에도 아무런 향기가 없는 동백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먹으며 꽃가루받이를 해준다. 이놈은 배가 연한 잿빛이고 나머지는 연두색이다. 흰 눈테를 가진 어린 참새 크기에 붓 모양의 돌기가 꿀을 빨 때 편리하다. 동백꽃의 꿀을 무척 좋아해서 원래는 '동백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법과 같은 자연의 섭리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 제주 대정(大靜) 마을에서 생활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내가 보낸 여름옷을 받고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이 봄날 밤을 새우며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이 이 겨울에야 도착했소. 나는 당신의 마음을 입지도 못하고 머리맡에 둘러놓았소. 담장에 핀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은, 당신의 두 무릎에 머리를 박고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도록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

그랬을까. 김정희의 아내는 남편을 만나지도 못하고 남편의 유배 중간에 죽고 말았다. 떨어져 있는 동백꽃은 마치 남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한순간 비장한 아름다움을 최고점까지 끌어올리고 불꽃으로 사그라진 한편의 정사같다.

옛 화가들은 동백 꽃송이가 청수한 자태로 낙화하는 것을 보며, 생멸의 미학을 논했다. 그랬으니 화선지에 먹을 갈아 까막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동백을 그려내었을 것이리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가야 할 때가…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은 제목이 <낙화>이듯 꽃이 지는 자연의 순환을 의인화와 중의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삶을 노래했다. 낙화와 이별은 이법(理法)이며 인생의 법칙이다. 이처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오는 때가 있으면 가는 때가 있고, 피어나는 때가 있으면 지는 때가 있다. 불가에서는 이런 '때'에 대해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유독 우리 인간뿐이다.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기회만 있으면 피어나려 애쓴다. 이런 모습은 추악하다. - 이형기의 '낙화'

인간도 갈 때를 정확히 아는 꽃과 같은 사람, 사라짐에도 아름다움과 미덕이 있는 그런 곳은 종교의 세계, 천국이나 무릉도원 등의 이상국가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래도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모어의 공상소설을 한 번 더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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