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막걸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나라·국가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 '관계' 만드는 도구로
도소주-이명주-머슴주-창포주-동동주 등 세시풍속과도 연결
일제강점기 '가양주' 사라져…젊은 층 관심 '복원'바람 눈길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명절이나 돼야 얼굴을 보는 친척 어르신들에게도 인사를 할 때도 쓰인다. 세시 풍속에도 이것이 빠지면 어딘지 허전하다. 요즘은 젊은 층, 특히 20대 여성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핫 아이템이다. 이런 조각들을 돌려 끼우다 보면 쓱 하고 맞아 떨어지는 것이 나온다. 다름 아닌 술, 꼭 집어 가양주, 전통주다.

# 마음을 나누고

정월대보름인 오늘(2일) 먹어야 할 음식 중에도 술이 등장한다. 귀밝이술이다. 데우지 않은 청주를 아침 식사 전 마시면 눈이 맑아지고 귀가 밝아져 한 해 동안 즐거운 소식을 듣는다고 여겼다. 이명주, 명이주, 청이주, 치롱주, 층이주 등으로도 부른다.

아침부터 무슨 술이냐 싶기도 하지만 '아침 공복의 차가운 술 한 잔'은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고 귀와 눈에까지 기혈이 잘 뻗어 나가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몸에 좋아서란 얘기다.

한해를 여는 자리도 술로 시작했다. 새해 새날 새 시간을 맞이하는 시간에 가족이 둘러앉아 일년 내내 무병하고 건강하게 지내자는 바람을 담아 세시주(歲時酒)를 마셨다. 대표적인 것이 도소주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함께 나눠 마시는 이 술에는 '사악한 기운을 잡거나 몰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월 머슴주, 5월 단오 창포주, 8월 한가위 동동주 등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설 선물 세트.  강원도 감자와 쌀을 발효시켜 만드는 전통주 '평창 서주'가 포함됐고 지역적 분배를 위해 충남 서산 편강, 경기도 포천 강정, 의령 조청 유과, 전남 담양 약과로 구성됐다.

# 누구나 즐기고

지금이야 사고나 불화의 원인으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지만 원래 술은 우리나라 음식 문화 중에서 역사가 깊고 무엇보다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해온 존재다. 

구기자, 인삼, 산수유, 대추 등의 약재를 술에 넣어서 술을 기호음료뿐만 아니라 보신과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건강주로 썼다.

올 설 대통령 설 선물 세트에 강원도 감자와 쌀을 발효시켜 만든 '평창서주'가 담긴 것이 단순히 종류나 지역 구색을 맞추기 위함만은 아닌 이유다.

절기마다 술을 빚어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며 풍요를 기원하는 과정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박목월 시인이 '나그네'에서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 노래했던 것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니라 그랬던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막걸리는 밥같이, 약주는 반찬 같이, 소주(증류주)는 술 같이 즐기라는 말도 전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막걸리는 아미노산이 풍부하여 밥의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고, 김치·풋고추처럼 간단한 안주와 곁들여서 즐기기 좋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또 ?맛이 비교적 화려한 약주는 여러 가지 반찬과 함께 하나의 찬으로 즐기기에 적당하며, 가장 도수가 높은 소주는 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대해 고단백 음식등과 함께 즐겨 속을 보호하고 몸이 상해지는 것을 막으라는 조언이기도 하다.

# 새로운 문화로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 나오는 술의 종류만도 380여종이나 된다. 일부에서는 문헌 기록 외에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술의 종류도 다양했고 집집마다, 또 지방마다 빚는 술이 달랐다는 것을 들어 수 만 가지가 넘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전해지던 술 빚는 기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다. 1916년 주세 수입 증액을 위해 부과했던 '주세령'으로 전통 가양주는 법적으로 금지됐고 전국 각지의 양조장은 통폐합됐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지역과 날씨에 따라 다양한 재료와 양조법으로 만들어낸 다양한 지역주들은 이제 '명주'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지역과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후 강원도 용평 블리스힐스테이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 리셉션에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적인 행사에서도 식사 메뉴가 뭐였는지 보다 '만찬주'에 더 큰 관심이 쏠린다. 술잔을 나누며 피로감과 긴장감을 덜고 동시에 다소 무겁고 서먹할 수 있는 분위기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행사 성격이나 초청 인사들, 지역적인 특성 등을 고려해 선택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일 리셉션에서는 전통주인 문경주조의 '오희' 스파클링 막걸리가 등장했다. '5가지 맛(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등)의 즐거움'이란 뜻이 올림픽 화합 정신의 '오륜' 마크와 연결됐다. 북측고위대표단이 참석한 청와대 만찬에는 한라산 소주가 나왔다. 서민적 이미지와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통일 염원을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미국 대통령 대표단인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이 참석한 청와대 상춘재 만찬에는 충북 영동 와인 '여포의 꿈'이 올려졌다.

지난해 전통주 온라인 판매 내용을 분석한 결과 소비자의 3분의 1이 여성으로 집계됐다. 특히 20~30대 여성의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술술 마시니 '술'이라 했다지만 자세히 들으면 '정정(情情)' '청청(淸淸)' '심심(心心)'하는 소리가 있다는 말이 있다. '술은 가리되 장소는 가리지마라'는 얘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술을 가려 마시지만 객이나 친구가 자리를 청하면 마다하지 말고 마음을 소통하라는 의미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