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공원에서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시인의 절절함이 귓전을 흔든다. 이맘 때면 어김없이 바람을 타고 온다. ‘그날이 오면’. 그 한 맺힌 소리에 하늘도 울고, 바다는 푸르른 멍을 드러낸다.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뭐든 못하겠냐는 목소리는 70년의 시간을 타고 점점 잦아든다. 눈이 부셔 더 슬픈 ‘4월’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머문다.

△아픔과 치유, 희망의 긴 호흡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캠페인을 알리기 위해 만든 홍보 영상이 따끔하다. 상처를 난 뒤 줄잡아 70바늘을 꿰맸지만 아직 남은 자리 선혈이 낭자하다. 없던 일까지는 아니지만 흉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갈수록 절실해진다.

아픔과 치유를 위한 바람, 화해·상생의 희망을 품은 공간이 다름 아닌 4·3평화공원이다.

1999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해 위령 공원 조성 사업비 지원을 약속하고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된 작업은 2003년 4월 3일 첫 삽을 떴다. 2008년 개관 이후 매년 이 곳에서 4·3 위령제를 치렀고 2014년부터 국가 차원의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저절로 무거워진 걸음을 떼게 된다. 떠나기 싫은 느낌이 아니라 ‘떠날 수 없는’에 가깝다. 70여년의 시간을 한꺼번에 만나는 일이 할리우드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눈 깜박할 새 가능할 리 없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39만 6743㎥(12만평)의 넓이에 위령제단·추념 광장·위령탑·상징 조형물 등이 조성되어 있는 위령·추념 공간과 4·3 사료관 등 역사 재현 공간, 4·3 문화관 등이 있다. 최근 문을 연 4·3어린이 체험관까지 호흡이 길어졌다.

△영웅이 아닌 민초들의 역사

4·3 발발 이후 70년, 해원하지 못한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4·3의 역사적 의미를 품으며 4·3을 상징하는 장소성을 더한 공간이다.

무엇보다 영웅주의와 메모리얼에 매달리며 외면했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기념하는 자리라는 점이 4·3평화공원을 다시 보게 한다.

해방 이후 빠른 시간 내에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휘둘렀던 이데올로기의 칼날은 효율적인 통제라는 목적 보다는 잠재적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 아래 양민학살이란 비극을 불렀다. ‘레드헌트’라는 작전명은 누군가 그런 것처럼 마법의 선동이었다. 애국심과 반공주의로 무장한 이들이 아직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갓난아이까지 죽였던 폭력을 자기 정당화하게 할 만큼 강력했다.

‘제주 4.3’이 제주라는 장소와 4월 3일이라는 비극의 순간만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꾸준히 정명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서 이 공간은 제주4.3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다.

여전히 ‘미완’이지만 그나마 이곳에서는 "아프다" 밖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들이 기념관에 남아있다. 차마 다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참혹했고 끔찍했던 사실들을 시간 흐름에 따라 마주한다. 더듬더듬 70년을 짚고 나면 다리에 힘이 풀린다.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그날이 오면’을 외치게 하는 이곳에는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공간이 있다.

행불인 묘역에는 아직까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의 운명을 가늠하지 못한 채 고단했던 역사를 대변하는 이들은 그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은 대부분 4·3사건 와중에 체포돼 타 지역의 형무소에 수감된 후 국가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표석으로 흔적을 남긴 이들은 확인된 것만 3781명(각 지역 수용소 및 형무소 별로 제주 1940기, 경인지역 536기, 영남지역 433기, 호남지역 384기, 대전지역 269기, 예비검속 219기 등 총 3781기 설치)이다.

4·3에 대한 제주의 기억과 외침, 바람은 공원 내 조형물들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천정에 뚫린 작은 구멍이 만든 한 줄기 빛이 그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는 하얀 비석이다. 그날 비명에 피붙이를 잃은 사람들,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뼈무덤 같은 ‘백비’는 남북을 갈라놓은 이념적 대립은 제주4·3이 국가 추념일로 지정된 이후에도 존재함을 상징한다.

공원을 따라 봉개동 지역에 토벌작전이 펼쳐졌던 1946년 1월6일 토벌대의 총에 희생당한 변병생(당시 25세) 모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모티브로 한 ‘비설’을 찾아가는 길에는 ‘웡이자랑’이 새겨져있다. 평화로워서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4·3을 기억하게 한다.

세계 저항시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심훈의 ‘그날의 오면’은 해방 후 그의 유고집을 통해 세상에 발표됐다. C.M.바우러는 이 시를 “일본인의 한국 통치는 가혹했으나,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를 평가했다.

제주 시인을 포함한 문학인들은 아직 4·3앓이를 자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그곳에는 4·3 시화전이 한창이다. 4·3평화공원의 시작과 끝, 활자가 된 4·3이 시간을 되돌리거나 또 빨리 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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