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신석기-탐라국의 시간
고려·조선을 넘어 오늘까지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사물을 보노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리거나, 심하면 멀미가 찾아올 때가 있다. 수만년 진화를 거듭해온 신체가 아직 이처럼 빠른 속도에는 적응이 덜 된 탓이다. 이럴 때는 가까운 풍경보다 먼 산을 지그시 응시하는게 도움이 된다. 우리 일상도 그렇다. 변화의 조류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가끔 시계를 덮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제주'에 산다. 박물관에서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우리가 사는 제주 안에, 우리와 함께 있어왔던 것들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제주섬에 사람 깃들다
'제주'는 그 안에 신화부터 무속신앙, 민요, 해녀, 돌문화 등 방대한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어 어느 것부터 살펴봐야 할지 막막하다. 사라봉공원 안에 터를 잡은 국립제주박물관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제주를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난해 3월 상설전시관을 새롭게 꾸몄다.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제주를 이해하는 길잡이로는 충분하다.

전시실의 첫 관문인 중앙홀 천정부터 압권이다. 스테인드글라스로 한라산 백록담의 전설과 탐라 개국신화인 삼성신화, 제주를 상징하는 삼다를 재해석해 장엄하게 풀어냈다. 신화의 신비로움과 섬을 감싸안은 한라산의 포근함을 마주하며 전시를 통해 펼쳐질 제주 이야기에 기대감을 갖게 한다.

'섬, 제주'로 시작하는 각 전시실은 제주섬의 탄생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시간들을 풀어낸다.

180만년 전부터 10만년 전까지 화산활동으로 제주섬이 만들어지고, 곶자왈과 다양한 생태의 보고 속에 이 땅에 최초의 인류가 등장하는 역사를 아로새겼다. 선사시대 사람 발자국 화석과 사람·동물·식물의 화석으로 태초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약 4만년 전 한반도와 중국, 일본 규슈까지 육지로 연결돼 있던 시절도 만난다. 사람과 동물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남긴 유적과 유물도 볼 수 있다. 사냥한 동물의 살을 자르던 뗀석기와 정교하게 만든 돌날·좀돌날 등 도구를 보면서 생활상을 떠올린다.

서귀포시 서귀동 생수궤 등에서 발견된 돌날을 보면 제주의 구석기인들이 한반도 못지 않은 석기 제작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확인하게 된다.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제주가 '섬'이 된 이후에는 따뜻해진 날씨 속에 한반도 남해안에서 신석기라는 새로운 문화가 제주에 들어온다.

특히 전시실 한켠의 고산리식토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토기로, 교과서에서 흔히 보던 빗살무늬토기보다 시대가 앞선다. 뾰족한 돌화살촉과 씨앗 껍질을 벗기던 갈돌·갈판 등으로 제주 신석기인들의 사냥과 채집 생활을 짐작케 한다. 석기시대라지만 한반도와의 밀접한 교류도 확인할 수 있다.

# 탐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섬마을의 발전과 변화' 전시실부터는 석기를 졸업하고 금속을 다루며 변화하는 제주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생활유물들도 이전보다 정교하다. 

특히 한반도 남부와 중국, 왜 등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활동으로 재화를 축적하고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만드는 발판을 세운 시기다. 

초기철기시대 종달리에서 발견된 한국식동검과 산지항에서 출토된 동으로 만든 거울, 심지어 요즘 팔리는 팔찌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한 수입 옥환도 삼양동유적 집터에서 발견됐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몸을 치장하는데 들인 정성을 알만 하다. 철이나 날카로운 돌을 구하기 힘들다보니 주변에 널려 있는 전복껍질로 화살촉을 만든 지혜도 돋보인다.

이쯤에서 날카로운 철제무기와 창, 도끼 등 지배계급의 등장을 알리는 유물들이 등장한다. 탐라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화려한 유리구슬 목걸이와 옥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의 아름다움에서 탐라국의 위세와 활발한 교역활동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화려한 역사 뒤 1105년 고려의 탐라군으로 편입되면서 탐라국은 나라의 지위를 잃고, 1295년 탐라라는 이름 대신 '바다 건너 고을'이라는 뜻의 '제주'로 불리게 된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선 삼별초의 항쟁과 원나라의 지배, 조선 건국에 이어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섬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시실에 흐른다.

지나고 보면 제주는 자연이 정해준 '바다'와 '섬'이라는 경계를 삶의 영역으로 두면서도 끊임없이 배를 만들어 교류하고, 문화를 받아들였다. 박물관에서 만난 제주의 시간은 절해고도에 고립된 섬이 아닌,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섬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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