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조금만 걸어도 여기저기서 봄단장 하는 소리가 들린다. 움츠렸던 겨울을 벗고 있는 것이다. 이불 빨래를 널어 논 베란다도 보이고, 아파트 나뭇가지에 빨랫줄을 걸어놓고 겨울옷을 말리고 있는 풍경도 보인다. 벚꽃 나무는 꽃 진자리가 아직 여물지 않았는지 불그스름 생채기가 보이면서도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싱그럽다고 하기에는 아직 더딘 봄이다. 

요즘은 지나는 사람들의 가슴께를 자주 쳐다보게 된다. 유난히도 동백꽃 배지가 눈에 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제주도민 누구나가 4·3의 아픔을 침묵으로서 다독이고 있는 4월인 것이다. 어떤 이는 가슴에 단 배지가 여럿인 경우도 있다. 동백꽃, 노란 리본, 소녀상 배지 등을 달고 있는 것이다. 자칫 과하다 싶다가도 이렇게 기억해야할 일이 많다니 하는 한숨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4·16이다. 벌써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는다. 세월호 참사 피해학생들 엄마들 이 '세월호 가족 극단 공연'을 한다고 한다. "이번엔 웃겨드리겠습니다"는 뉴스 타이틀이 가슴 아프게 들린다. 수학여행을 앞둔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모양이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노랑머리 염색을 한 학생들이 천연덕스럽게 춤을 추고 자랑스럽게 엄마 아빠를 부르고 있다. 웃다가 울게 된다.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드는 여우비에
일제히 목을 놓는 꽃들의 환한 도열
꽃받침 덩그런 자리 미열 아직 남았다

못 지킨 언약처럼 필 때보다 질 때 붉은
서로가 미루지 않고 유감없이 저무는 일
덧 자란 그늘에 덮여 봄은 마냥 저만치다

오면 가는 것이 숨 탄 것의 항다반사
목숨껏 받는 나날 다 앗기고 스러졌다
꽃으로 다녀갔구나, 날 잃고 널 얻었는데. (이승은 시, 「더딘 봄」 전문)

"못 지킨 언약처럼 필 때보다 질 때 붉은" 형상을 본다. 나이든 나무는 생채기 자리에 가지를 이어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대를 잇는 방식이다. 아픔도 대를 잇는다. 아픔을 곱씹는다기보다는 더 이상을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새 가지를 뻗고 있는 것이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도 이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파헤치는 작업도 필요하지만 파헤쳐진 그 자리에 돋아난 상처를 잘 쓰다듬고 마무리 지어 유쾌하게 새로운 기억,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 그림기록전은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 그림기록전은 4·3 생존희생자 18명과 제주작가 9명이 함께 한 작업이다. 4·3 피해 생존자들이 기억하는 것은 무엇이며, 아픈 상처를 어떻게 견디어 왔을까를 서로 공감하고 함께 치유하는 작업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생애 처음으로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찰이 어머니 등에 업인 양창옥 다리를 잡아 댕겨서 바닥으로 매다쳐서 양창옥 다리를 빠지게 만들었음" (4·3생존희생자 양창옥님의 그린 성명 중)

"지금이라도 멀쩡한 손과 다리로 살아갈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8살 때 얘기를 하면 눈물이 나온다. 이제는 집에서 그림 그릴 때가 제일 좋다."(4.3생존희생자 강순덕님의 <나의 왼손> 중)

글자가 틀리건 문장이 되던 안 되든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그걸 다시 기억해?  눈물이 말랐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눈물이 마른 척 살아왔을 뿐. 어르신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두려움의 더께로 싸인 기억의 지층들이 깨지면서 한동안 많이 아팠을 것이다. 헤진 가슴 그 자리에 새순 돋아나게 하는 일, 이것이 후 체험 세대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기에 우리는 해마다 그날들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이번엔 웃겨드릴게요."라고 당당히 웃으며 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잊지 말자 4월.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