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1978년에 TV방영을 위해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홀로코스트'는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에 소개됐다고 기억한다.
 

특히 독일인에게는 그중에서도 전후 세대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이게정말 우리나라의 역사인가. 그 전쟁과 학살의 현장에 있지 않았던 자녀 세대는 과거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독일의 지성들이 논전을 벌였다. 이를 두고 역사가 논쟁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1986년에 촉발된 지상 토론에 역사가, 사회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등 독일의 학문과 여론 형성을 대표하는 논객들이 참여했다.

독일의 우파 지식인들 중에서는 전쟁에 졌다고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는 주장이 생겨나기도 한다. 전승국이라고 해서 신사적으로 전투에 임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 위해 총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닌가.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게 어디 한 두 번이었나. 실제로 역사의 고비에서 유대인은 번번이 희생양이 되곤 했다. 십자군 출정을 준비하면서 공존하던 지역의 유대인들을 죽인 사례도 꽤 있다. 그리스도의 적은 무슬림 말고도 유대인이 있지 않냐는 논리였다.

실제 그 논쟁의 최전선에 투입된 인물들은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정치적인 입지를 넓히려 한 양대 정당이 개입된 사안이었다. 독일은 우리와는 정치환경이 달라서 많은 학자들이 정당에 가입돼 활동하거나 혹은 발언을 통해 지원한다. 교사들도 정당 활동의 권리가 보장돼 있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보수정당인 기민당은 전쟁과 학살의 참혹함은 독일 나찌에 국한된 특수한 사건이 아니고 러시아의 스탈린 지배에서 보듯이 광범위한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전후세대가 이에 대해 죄의식에 매여 있을 이유는 없다는 주장이다. 히틀러 시대에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전후에는 기민당의 표밭이 됐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정당인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브란트와 슈미트 총리 시대에 집권정당으로서 책임을 지고 국정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세대가 연대하고 공과 더불어 과도 함께 계승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 대한 모범 답안은 이미 1985년에 제시됐다. 종전 40주년 기념연설에서 바이채커 대통령은 이를 지적했다. "과거에 대한 눈을 감은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눈을 감을 것"이라는 명언이 여기서 생겨났다. 과거의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기억하려 않는다면 새로운 감염의 위험성이 나타났을 때 재차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서 화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기민당 출신이었고 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개신교 평신도대회 중앙위원으로 오래 활동했다.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지도자로서, 도덕성과 더불어 경건함에서도 모범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의전상 국가원수일 뿐이었던 전임자에 비해서 책임있는 발언들을 하게 됐다.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기미년 삼일운동과 상해임시정부 백년을 맞으며 여러 가지 주장이 다시 맞부딪히는 현실을 확인했다. 역사전쟁이라는 표현도 결코 과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양 진영은 팽팽하게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통일을 향한 환경 조성의 단계로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독일의 경우 80년대의 논란이 결코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고 갑자기 찾아온 재통일의 준비단계였음을 이제는 누구나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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