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문화로 꽃 피우다20-제주해녀문화의 선택과 과제④

분야별 필요 기술자 중 ’해녀‘포함…독도 작업 기록도
사람 아닌 ’노동력‘, 수탈 피해에 있어 최약자로 상처
고 홍석랑 할머니 등 기억 흔적만 남아, 자료화 절실

제주해녀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의 자료집(1933)

‘No 아베’를 앞세운 일본 불매 운동이 한창이다. 일본 일방적인 경제보복과 백색리스트 제외가 국민 감정을 건드렸다고 하지만 그 시작점은 지난해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후속 조치로 진행된 일본 전범기업 자산 압류와 강제 처분 절차다. 우리나라 경제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고, 소녀상 전시를 막는다고 위안부, 강제징용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 제주해녀들의 역사도 그러하다.

△맞춤형 징발 대상으로

광복 50주년이던 지난 1995년 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관련 인물들이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 이후 추가 인정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중요한 작업이다.

“역사는 아무리 구멍을 파서 숨기려 해도 나올 때는 나온다”는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70)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해녀항일운동이 당시 제주해녀의 실상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일제 강점기 전분야에 걸쳐 폭넓게 이뤄졌던 노역 징용에 있어 해녀는 빠지지 않는다.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미 오래전 관련 자료들이 공개됐지만 해녀에 대한 관심은 아직 여기까지 충분히 미치지 않은 상황이다.

강제동원이 본격화한 1939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총동원 태세의 진전」에는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이 해녀와 심마니, 땅꾼 등 134개 직종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이뤄졌다. 마구잡이식 차출을 통해 조선인들을 데려가 군인, 단순 노무자 등으로만 배치한 게 아니라 분야별 필요에 따라 각종 기술자들을 맞춤형으로 징발해 노역에 동원했다는 방증이다.

내용 중에는 ‘국민직업신고령이 내려져 (강제동원이) 실시되었다. 시국(時局·전시 총동원체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직업 134종에 종사하는 자, 특수학교 졸업자, 양성소에서 일정기간 검정한 자’라고 명시돼 있다. 해녀 역시 당시 일본에는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일제강제동원규명위의 미공개 자료에도 50여종의 각종 직업인들이 강제 동원된 사실이 확인된다. 제주 해녀 등 조선인 수십 명이 독도로 끌려가 수산물 채취 등 강제노역에 시달렸다는 내용은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관계철에서 확인된다.

조선인 징용자가 독도로 끌려가 전복과 소라를 채취했다는 내용은 1921년(대정 10년)부터 확인된다. 두세 명의 일본인 감시하에 40여 명의 조선인 어부가 독도에 살았다는 내용과 더불어 1941년 제주에서 해녀를 데려와 일을 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920년대 한 일본인 어부가 썼다고 알려진 ‘독도일기’를 보면 당시 일제가 조선일들의 독도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며 일본인들의 어업권을 보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해녀들의 독도물질이 강제노역, 징용에 의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40년 어간 징용으로 독도에 끌려간 조선인 어부와 해녀

△노역이 아니면 ‘정신대’

제주도의 「제주항일독립운동사(1996)」에는 “1938년 5월에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으니 이는 중일(中日)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침탈적 제국주의자의 무소불위의 소행이었다. 이 동원령은 한국사람을 전장(戰場) 혹은 노동현장으로 강제 징용할 수 있고 또 생산된 농산물의 공출이거나 사유물을 강권으로 징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1943년 8월에 '여자정신대근로령(女子挺身隊 勤勞令)‘공포 후 조선 전라남도와 제주도에서 18세 이상 30세 미만(기혼자도 무방, 단 임신부는 제외) 신체 건강한 자로 황군(皇軍)을 위문할 조선인 여자정신대 200명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여성을 징용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던 탓에 저항도 있었지만 성산포의 단추제조공장에 임시 고용된 여공 100여명과 조천면 산간 부락 순대식품공장의 여공 180여명 중 일부, 법환리 근처 8㎞ 연안을 돌며 강제 집행한 해녀, 한림읍 옹포의 처녀 등 205명을 모았다는 증언도 담았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사이 잊혀지고 사라진 부분이다.

고 홍석랑 할머니

△징용물질 증인 사라져

’고 홍석랑 할머니‘의 이름 석자 역시 기억하는 누군가에게만 남아있다.

1923년 제주 한림읍 금능리에서 태어난 홍 할머니는 징용물질의 산증인이었다.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진 이듬해인 1944년 말이 좋아 '모집'형식으로 일본에 끌려온 뒤 군수산업에 동원됐다. 화약 원료인 감태를 채취하는 일을 했다. 이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태평양쪽으로 이동했다. 1988년 일본 일본 ㈜신숙서방에서 발간된 재일 조선인 2세 김영.양징자씨의 「바다를 건넌 조선의 해녀들」에서 홍 할머니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 몰랐던,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역사였다.

지난 2017년 9월 어느날 홍 할머니가 소천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역사가 됐다.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자주권을 찾기 위해 애썼던 이들에 대한 공적을 인정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살아있는 누군가에 그 업을 전하는 일 또한 경중을 가릴 수 없는 부분이다. 홍 할머니는 징용물질을 했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군수산업을 도왔다는 점, 그리고 ’급여‘를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징용 보다는 ’경제적 이유‘에 무게를 두는 해석도 있다. 해석하는 것은 자유지만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 제주사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 입각해 ’제주해녀‘를 읽는 작업은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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