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사유 사물과 풍경 37. 붉은 울음의 기도소리를 듣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참빗살나무를 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가늠이 된다. 어쩌면 지금은 자세를 낮추고 더 깊어져야 할 때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걷기에 좋은 날씨다. 하루 이틀 사이로 추위가 몰려올 것이다. 유난히도 날이 푹하니 후덥지근하다 싶은 날, 아침산책길에 나선다. 항파두리성 한 바퀴를 돈다. 성안은 고요하고 국화향기로 코가 호강한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섬 제주, 두려움과 희망은 늘 바다 넘어서 밀려 왔다"는 옛사람들의 고백을 더듬으며 성안을 걷는다. 성은 단단하고 높다. 저 멀리 파도가 일고, 배는 가는 줄 모르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바닷바람이 솔 향에 실려 밀려온다. 비행기도 가끔씩 날며 정찰을 하고 있다. 

성안에 있으니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게 편안하다. 갇힌 자의 고요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때로는 이렇게 스스로 갇힐 일이다. 하지만 마냥 갇힌 다는 건 서러운 일이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다. 갇힌 이를 마냥 기다리는 일만큼 잔인한 일도 없다. 독도 소방 구조헬기 추락사고가 스무 날이 넘어가는데 기상악화로 실종자 수색이 아직도 빈손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애가 타는 이들이 너무 많다. 파도가 그 마음을 알까 싶다. 기약 없이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이들, 아직도 바다에 자식을 바치고 서러운 눈물마저 말라가는 이들을 생각하면 한가로이 걷는 일도 미안하다. 

모두의 바람인 듯이 참빗살나무가 붉다. 나무의 붉은 울음이 하늘을 향해 마지막인 듯 말없는 아수성이 강렬하다. 지나가는 이가 나무숲에 들어 참빗살나무의 울음을 찍고 있다. 수명이 다한 촛불들은 나무 아래로 바스러진 잎사귀를 누이고 있다. 몸을 더 낮추고 썩어 문드러지면 깊은 뿌리로 내려가 다시 기운을 모으고 소망을 켜 올릴 것이다. 나무를 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가늠이 된다. 어쩌면 지금은 자세를 낮추고 더 깊어져야 할 때가 아닐는지. 


「불타는 얼음」, 허형만

울릉도와 독도 주변
수심 3백 미터 이상 해저 지층에 
차세대 청정에너지 '불타는 얼음'이라고 불리는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무려 6억 톤 가량 묻혀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나에게도 
가슴 속 저 5백 미터 깊은 심연에 
불만 붙이면 활활 타오를 
그리하여 마침내 물과 이산화탄소만 남을
'불타는 얼음'이 10억 톤 가량 매장되어 있다
저 숲속 돌멩이도 깊은 잠에 든 시간, 
이 '불타는 얼음'을 품고 
나는 이 세상 마지막 인사처럼 
너를 향해 뻘밭 같은 질긴 숨을 내뿜는다.

 

시를 읽으며 나무의 붉은 잎사귀는 어쩌면 '불타는 얼음'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땅 속에 매장된 생명들에 대한 마지막 충정을 다하려는 남아있는 자의 슬픔인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재수사에 본격 착수한다고 한다. 5년 만에 다시 본격적으로 재수사한다니 반갑기도 하면서 제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세월호 사건만큼은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 하며, 아직도 붉은 울음을 울고 있는 부모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검찰이 스스로 공정하고 법과 원칙을 따르는 걸 제1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 것이다. 또한 세월호 사건만큼은 절대로 어떤 정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요즘의 정치는 신뢰를 상실한지 오래어 사뭇 걱정된다. 시민으로서의 순수한 참여 목소리마저 도구화 되거나 왜곡되기 일쑤다. 그래서 정치와 언론이 시민의 정신건강에 가장 해로운 매체가 되고 있다면 과장일까?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 요인 제1순위다. 

영화 '체인질링'의 한 장면.

영화 '체인질링'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 수많은 사건들을 연상시키게 한다. 아들을 되찾기 위해 세상과 맞선 엄마콜린스(안젤리나 졸리 역)의 처절함과 절박한 심정이 잘 그려진 영화다. 1928년 LA에서 발생한 실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어느 날 콜린스의 아홉 살 난 아들 월터가 실종된다. 삶의 전부와도 같은 아들의 실종으로 콜린스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실종된 지 24시간이 지나야 수사가 가능하다며 기다려보라고 한다. 애들은 기다리면 나타난다는 안일한 답변만 한다. 연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경찰들의 부패와 무능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5개월째 접어들면서 급기야 경찰은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자들과 경찰에 둘러싸인 채 나타난 아이는 콜린스의 아들 월터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는 자신이 월터라고 한다. 이런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경찰의 조작이었던 것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를 찾아내 자신이 월터라고 주장하라고 단단히 무장시켰던 것이다. 콜린스는 자신의 아이를 찾아달라고 강력하게 간청했지만 자신들의 실수가 발각될까봐 두려운 경찰은 콜린스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한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 역)의 도움으로 콜린스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하게 되고, 아들을 찾는 여정은 계속된다. 결국, 아들은 찾았을까? 아동을 유괴해 20명이나 되는 아이를 살해한 고든 노스콧(제이슨 버틀러 하너 역)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월터의 생사는 지금까지 미지수다. 

'영화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실화라고 하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비통감에 몸서리치게 된다. 하기야 영화 같은 실화들이 지금 이순간도 벌어지고 있으니 세상은 참으로 무섭고 슬프다. 지금도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은 화성사건도 그렇고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아직도 우리사회가 진 빚이 크다. 어둠의 빛이 되어야 할 권력이 제 힘겨루기에 목을 매고, 경쟁심에 불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에만 시간을 죽일 때 아직도 어둠속에 갇힌 심장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빗살나무의 잎사귀를 보며 우리가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던 붉은 울음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한가로이 거닐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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