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미 취재1팀장·부국장

얼마 있으면 민족 최대 명절 설이다. 명절이란 단어만으로도 풍성하고 넉넉해야 할 일이지만 올 설은 조금 복잡하다. 최근 몇 년 경기둔화로 인한 피로감이 쌓인 상태에서 80여일 남은 4·15총선까지 '밥상'에 올려야 할 것이 차고 넘친다. 명절 연휴가 지나면 경선까지 한 달 남짓한 시간밖에 남지 않는다. 명절 기간 판세가 결정될 거란 건 정치판에 끼지 않아도 안다. 이미 두 손으로는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의 정치 지망생들이 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 등록을 마친 뒤 선거사무소·캠프를 차리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다.

'민생' 최고 화두로 

여야 '프레임 대결'도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15일 공개한 여야 1호 공약부터 미묘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총선 1호 공약은 각 당의 총선 핵심 전략을 담고 있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소득 하위 70%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 30만원 균등 지급을 1호 공약으로 내세워 중장년층을 끌어안았다.

이번은 '공공 와이파이' 확대 정책, 이른바 '데빵(데이터요금 제로)시대' 개막에 1호 타이틀을 달았다. 대안과 공유에 민감한 밀레니언 세대 '청년'을 올 총선 주요 키워드로 읽었다. 선거법 개정으로 21대 총선부터 투표권을 갖게 된 '만 18세 표심'까지 염두에 둔 포석으로 해석된다. 먼저 움직인 정의당의 1호 공약은 만 20세가 된 청년 모두에게 현금 3000만원을 지급하는 '청년기초자산제'다. 자유한국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폐지와 검찰 인사독립을 언급하던 분위기를 정리해 재정건전성 강화와 노동시장 개혁, 탈원전 정책 폐기 등을 포함한 경제공약을 '총선 공약 1호'로 내걸었다.

제주 지역 후보군들의 키워드 역시 '민생'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어디를 보는지, 누구를 살피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 어렵고 힘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적임자임을 강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설 민심을 품어야 총선에 웃는다지만 어느 밥상에 숟가락을 얹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각자는 세상을 바꿀 준비로 뜨겁지만 중요한 것은 '밥상' 사정이다.

조선 시대 왕들의 밥상 정치학을 살핀 「왕의 밥상」이란 책이 있다. '12첩'으로 알려져 있는 수라상에는 흔히 씹고 음미하는 '먹는 즐거움'은 없었다는 뾰족한 분석이 흥미롭다. 흔히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 '임금도 부럽지 않다'고들 하지만 왕에게는 밥상 역시 하나의 정치의 무대였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군·현군 등을 일컬어지는 임금들은 백성의 굶주림을 함께 나누며 혀끝으로 느끼는 정치를 행했다.

예를 들어 나라가 가뭄과 홍수 같은 재난에 처해 있다면 왕은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아예 밥상을 물리기도 하고(감선·減膳), 고기반찬을 줄여(철선·撤膳) 고통을 나눴다. 당쟁으로 어지러울 때는 이를 다스리기 위해 아예 수라를 들지 않는(각선·却膳) 것으로 당파를 믿고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견제했다고 한다. 수라상에 오르는 많은 반찬은 그 가지 수 만큼 지역경제와 민심을 상징했다. 조공을 올리는 지역 입장에서는 입이 바짝 마르고 손이 떨릴 일이지만 때에 맞춰 재료가 도착했는지 그 양이 많고 적음으로 지역 사정을 읽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어떻게'까지 살펴야 선심

밥상 민심이라는 것을 특정한, 또는 가까운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무려 9000개의 미뢰를 가진 섬세한 감각기관인 혀 끝으로 느껴지는 절절함을 대신할 명문도 찾기 어렵다.

왕의 밥상이라고 부러운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가 중요하다. 값진 음식이라도 편한 마음이 아니면 독이 될 수 있고 푸성귀 하나라도 약이 될 수 있다.

'잘 살게 해 주겠다'는 수 십 가지 약속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어떻게'가 없는 약속은 선심 축에도 못 든다. 이번 올해 설 민심은 더 겸손해야 한다는 조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제 생각, 계획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민심은 움직이는 대신 귀를 막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 안에서도 온갖 논란과 갈등, 경기둔화 장기화로 가뜩이나 서글프고 안타까운 만큼 냉정해지고 예민해진 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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