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제주의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선다. 대평리 마을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안덕계곡을 따라 바다동굴 속으로 들어가듯 내리막길을 가면 넓은 평야와 바다가 나를 안아준다. 알록달록 높고 낮은 집들의 색감은 주변의 산과 바다, 곡식들과 잘 어우러져 사계절 생기 있게 살아 숨 쉴 것 같다. 어쩌다 한 번 찾는 나그네의 환상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길을 걷는데, 저만치서 한 할머니께서 유모차를 끌고 오르막을 올라오고 계시다. 멀리서 우리 일행을 보니 뭐라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린다. "막 찍지 말라. 무시 것 허젠?", 주변의 보리밭 풍경과 한 곁에 널브러진 마늘을 찍고 있는데, 왜 그것을 찍느냐는 얘기이다. 알고 보니 할머니 밭을 우리가 찍고 있었던 것이다. 찍지 말라고 한 건 농담이라며 일행 곁으로 와서 함박웃음을 짓는 할머니의 치아가 가지런하다. 

내친김에 두꺼비산(군산) 앞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한 말씀 청한다. 나이가 들면 오지랖이 넓어지는 건 맞는 말 같다. "게난 몇이나 납디까?"로 시작한 대화는 한 시간 여 끝이 없다. 연세는 여든여덟, 열아홉에 이 마을로 시집와서 70년을 살았단다. 아들 셋, 딸 셋 낳아 4년제 대학 다 보내고, 시집 장가 다 보냈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다. 특히 "4년제 대학 다 보냈다"는 부분에서는 얼굴에 근육이 살짝 떨리는 듯한 기운도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고생이, 얼마나 많은 한숨과 웃음이 있었겠는가. 자식 낳고 길러 출가시키기 까지 반백년 역사에서. 젊어서는 목화공장도 운영하시고, 목화씨 팔러 팔도강산 다 다니고, 안 해 본 일 없이 다해 보았단다. 남편은 마을일로, 당신은 집안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살았는데, 눈 뜨고 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고. 여든여덟 지금도 농사일을 한다며 보리밭을 가리킨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들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 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쳐박혀 벌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 시, 「농무」

농사라고 지어봐야 본전도 못 뽑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일부 농가에서 큰 수익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만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을 단위로 영농조합을 만들어서 서로의 머리를 맞대어 농사짓고, 수ㆍ판매 전략을 세워 수익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은 하고 있지만 산업농이 성공하려면 기업, 관과 연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익이 그만큼 줄어드는 건 뻔 한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농사를 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농민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세계농민 자살률이 참전 군인수보다 높다는 통계가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해마다 농사로 인한 빚을 감당하지 못하여 목숨을 내려놓았다는 자주 뉴스가 들리지 않는가. 얼마 전 뉴스에도 "마늘 등 농산물 판로 막혀 생산비도 못건진다"는 제주농민들 소식이 들렸다. 

농사의 어려움은 농사를 지어봐야 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 힘으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없어 부모님의 잦은 한숨소리에는 익숙하다. 한 해 배추 값, 보리수매가, 마늘 값에 집안의 공기가 달라지고, 아버지의 술주정도 해마다 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 아이의 나이가 그때 내 나이만큼 되었을 즈음, 텃밭 수준의 농사일을 하게 되니 농민의 설움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토종 묘종 나눔 행사가 있다고 하여 엊그제 묘종 몇 개를 얻어와 밭에다 심었다. 한나절 일에도 자고 일어나니 삭신이 쑤시고 아리다. 비가 와야 어제 심은 모종이 살아날 텐데 하며 자꾸 날씨를 검색하게 된다. 벌떡 일어나서 밭에 물을 줘야 하나, 작고 여린 것들이 어떻게 목숨을 건재할 수 있을는지 궁리하게 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오가와 신스케의 영화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Magino Village-A Tale 1985)'는 일종의 농민사랑일기이다. 1966년, 일본 정부는 나리타에 공항을 신축하겠다고 공표했다. 도쿄 근처의 조용한 농촌인 나리타에 새 공항을 세운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면서 지역 농민들이 반대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를 오가와 신스케 감독이 다큐멘터리 연작으로 제작하게 된다. 영화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화를 미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아주 간단한 답을 준다. 일상으로 들어가라! 내가 답고 싶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 그래서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오가와 감독입니다. 이곳은 마기노 마을이고, 우린 이곳에서 살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실제로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마기노 마을로 들어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일 년 내내 벼가 자라는 모습을 저속카메라에 담았고, 자연과 살며, 벼농사를 지으며, 그 속에서 삶과 싸우는 농민들의 삶을 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농민들의 삶의 현장, 노동의 역사가 바로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일본의 농민들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를 쓰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2011년, 중국 광저우와 선전, 그리고 홍콩을 잇는 고속철도건설을 위해 차이위안 마을이 철거된다. 강제이주를 당한 농민들은 상우드군에 새로운 마을을 만든다. 예술가들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을 배우고, 농민이 되어간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벼농사를 짓다'이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영화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에 대한 오마주 같은 작품이다. 

홍콩의 챈 호 룬 프레디 감독은 <벼농사를 짓다>에서 농민이 되어가는 예술가들의 이야기, 예술가들이 발견한 농민들의 삶, 그들의 투쟁을 그린다. 영화는 인간의 삶을 벗어날 수 없고, 치열하게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예술의 본위를 보여준다. 농민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 속으로 들어갔던 예술인, 예술작품을 통해 제주의 오늘을 생각해본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투쟁의 목소리들, 잠시 잊고 있었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지. 밭을 갈듯 내 삶의 기반을 흔들고 있는 시장경제 논리 속에서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는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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