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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부르는 몸의 기억

기사승인 2020.06.01  0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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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골목이 참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말을 들으면 골목은 어디에서나 다 예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형상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은 어떤 기억에서 연유하듯이 골목에 대한 인상도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았던 예쁜 추억이 떠올라서이지 않을까. 

마을길을 걷다 보면 골목을 잇고 있는 돌담에 눈이 간다. 돌담에 낀 이끼를 볼 때 더욱 반갑다. 돌에 낀 이끼는 그만큼의 세월을 말해주는 것이기에 헐지 않고 남았다는 게 반갑고, 그 시간동안 돌담에 기대어 피고 진 꽃들과 그 아래서 소곤소곤 왁자지껄하던 웃음들이 상상되는 까닭이다.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피어오르던 연기마저도 돌담 구멍을 타고 솔솔 풍겨오는 듯 착각을 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금은 연기날 일이 없으니 어디선가 마른풀냄새가 나면 어찌 반가운지. 어디서 풀이 마르고 있는지 헤집고 다닐 태세다. 

거름 냄새. 마을 밭길이나 오름을 오르게 되면 거름냄새가 훅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비가 온 다음 맑은 날이면 더욱 심하다. 지열과 함께 올라오는 것인데, 거름냄새를 맡노라면 배앓이가 시작된다. 흙 속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듯이 내 배 속에서도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 옛날 해충약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병원에서 소변을 받아오라면 겁이 난다. 혹시나 무언가 발견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 그것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맞닿는다. 아무렇지도 않던 배가 선생님이 준 해충약을 먹고 나서 배가 아프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원래 아팠던 것을 몰랐던 것인지, 약을 먹고 나서 아프기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도 복통의 증상은 기억과 관련이 있다.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름을 부르며 "이거 꼭 먹어라"며 눈 부릅뜨고 강조하시던 선생님의 눈빛. 첫 경험이 그래서인지 해마다 그날이 오면 어디 가서라도 빌고 싶었다. 아침 일찍 당으로 향하시는 어머니한테 마음으로 '해충 안 나오게 해주세요.' 라고 빌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 시절은 여간 속상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몸이 기억은 무섭고 두렵다. 

제주에는 유명한 폭포가 몇 군데 있다.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천제연 폭포 등. 폭포 아래서 물 맞는 풍경은 지금도 진기한 풍경으로 자주 회자된다. 어린 시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돈네코로 물 맞으러 갔던 기억이 있다. 아마 백중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뒷집 아저씨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연통에 다리가 데이는 바람에 돈네코 물에 다리를 담고 한참 물 맞는 풍경만 바라보았다. 아프고 심심했다. 

'앞막은굴폭포'라는 곳은 처음 듣는다. 대평리 마을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는 이가 아니면 모르는 이가 많다고 한다. 관절염 앓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쫓아갔더니 진기한 풍경을 만난다. 화강암 사이로 물이 세차게 흘러내린다. 3단 폭포 중에 제일 아랫단 폭포의 모습이다. 일행은 위단을 더 보고 싶다며 바위 위로 올라가는데, 나는 다리 핑계를 대며 그대로 머물러 물소리를 듣는다. 바위의 형상도 진기하거니와 주변의 대나무 모습도 어떤 정령을 닮았다. 두께로 보아 50~60년은 될 법하다. 휘파람새 소리가 물소리보다 청량하다. 새의 소리를 들으면 몸의 어디에 저런 울음통이 있는가 싶다. 벌써 6월이니 휘파람새의 짝짓기 계절이다. 그러니 울음이 더욱 클 수밖에. 휘파람새가 한번 휘젓고 나니 대나무숲이 흔들린다. 

이른 새벽
도도새가 울고 바람에 가지들이 휘어진다

새가 울었을 뿐인데 숲이 다 흔들 한다
알을 깨고 한 세계가 터지려나보다
너는 알지 몰라
태어나려는 자는 무엇을 펼쳐서 한 세계를 받는다는 것
두근거리는 두려움이 너의 세계라는 것
생각해야 되겠지
일과 일에 거침이 없다면 모퉁이도 없겠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는 일이라고
저 나무들도 잎잎이 나부낀다
어제는 내가 나무의 말을 들었지
사람은 나뭇잎과도 같은 것
잎새 한자리도 안 잊어버리려고
감미로운 숲의 무관심을 향해 새들은 우는 거지
알겠지 지금
무엇이 너를 눈뜨게 하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천양희 시, 「새는 너를 눈 뜨게 하고」

새의 울음소리와 폭포 아래 연못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생각한다. '"감미로운 숲의 무관심을 향해 새들은 우는"걸까?'라고. 어쩌면 새는 자기 일을 한 것인데, 사람은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니 풍경마저 자기해석이 아닐는지. 새가 운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해석이 따름일 것이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부르는 것인지, 사랑고백을 하는 것인지 어찌 알 수 있는가. 새 전문가들은 새의 소리를 구분할 줄 안다던데 그마저 가끔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새에게 물어 봤냐고" 라며 입술을 심하게 이죽거리고 싶어진다. 

한 10여분 앉았을까? 이런 공간을 나만 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올 수도 있겠구나 싶다.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몸의 근육들을 물어주면서 드러눕고 싶어진다. 안개가 피어오르며 땅에 묻힌 영혼들이 나를 쓰다듬으며 사느라 애쓴다고 말해줄 것 같다. '다리도 부었구나. 어이구, 애쓴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쉬었다 가렴.', '아무 거나 밟지 마라. 다른 생명에게 야박하게 굴 일 없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 같다. 마치 가와세 나오미 영화에서 처럼. 

가와세 나오미 영화 '너를 보내는 숲'은 2007년 칸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다. 영화는 아이를 잃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요양사 마치코(오노 마치고 역)가 요양원의 노인 시게키(우다 시게키 역)를 아내 마코(마스다 카나코 역)의 무덤이 있는 숲으로 데려다 주는 여정을 보여준다. 도중에 시게키가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지만 어렵게 다시 찾아 무덤을 찾게 되는데, 그 안에서 서로 상처받은 영혼이 스르르 치유 받는 경험을 한다. 

오래 전에 보아서 장면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어두운 숲의 계곡 물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 카메라는 흔들리는 소리는 아직도 선명하다. 마을과 숲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흔들린다.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자의 온기가 있다면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자를 따뜻이 안아줄 수 있다는 것. 길을 잃고 헤매는 시게키를 발견하고, 자신의 체온으로 노인의 몸을 녹여주는 마치코의 깊은 사랑. 그것은 숲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앞막은굴폭포에 잠시 앉아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 '너를 보내는 숲'을 떠올리고, 잠시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쉰 넷의 젊은 아버지는 아직도 그곳에 잘 계신지. 그때는 나도 아직 어린 나이라 아버지 가시는 길이 어디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늦은 안부를 묻게 되는 것은 어쩌면 숲의 정령의 도움이 아닐는지.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아직 숙제를 다 하지 못한 몸이 기억하는 일이려니 싶다. 한 번도 끌어안지 못한 냄새나는 아버지의 몸, 폭포 물에 씻겨드리고 싶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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