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0주년 특별대담] 현기영 소설가

창간호부터 제민일보 지켜온 산증인
"시행착오 인정…새로운 토닦음 기대"
막개발·이기주의 불편, '활자'역할 중요
"마지막까지 4·3원혼 위무하는 무당으로"

"1990년/불꽃섬 제주도에/50만 도민들 열망 하나로 모아/깊은 어둠 깨고/죽순이 곳곳하게 빛을 향해 솟아나듯/도민들 논이 되고/도민들 귀가 되고/도민들 입이 되고/도민들 넋이 될…"('이제 여는 세상에 우뚝 서리라' 제민일보 창간호 고 문충성 시인 '탄생의 노래' 중)

'제민일보' 창간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 사원의 주주참여와 도민주 공모 등을 거쳐 창간호를 발행하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들숨과 날숨을 나눴던 노 작가는 '정론'과 '직필'의 의미를 되새겼다.

민족 문학의 거장, 제주 민중의 삶을 치밀하게 탐색해온 현기영 소설가(79)는 '올해가 제민일보 창간 30년'이란 말에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는가"라며 생각에 잠겼다. 

1990년 1월 살이 에일듯한 한풍에도 '참언론'을 부르짖던 현장을 지켜봤고, 창간호부터 활자와 기록의 역할을 강조했던 그다. '4·3 작가' '4·3 신문'이라는 연결고리는 혈육의 정보다 더 끈끈하다. 아이로 비교한다면 태어나 첫울음을 듣고, 걸음마를 떼고 잘 자라 어쩌면 한 가족의 가장으로 세상에 내놓을 시기까지 함께 했다.
 
- 제민일보 30년에 대한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지금 이 감정을 표현할 말이 없다. '제민일보'라는 이름으로 일어서기까지 과정이 마치 어제 일 같다.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다. 그래도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응원했다. 그것이 제민일보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이 30년을 있게 한 것 아닌가.

- 창간호부터 꼭 필요한 부분에 방향을 잡거나 목소리를 내는 일을 하셨는데.

공동체 전체에 선(善)이 돌아가는 공공선이라고 생각했다.

제민일보는 창간부터 '4·3은 말한다'를 연재했다. 제주 출신, 지역 언론이라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78년 북촌리 학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을 때도 그랬지만 그때도 시대가 허용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순이삼촌' 은 14년간 금서였다. 군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지금은 청소년권장도서로 까지 나왔지만 한동안 국방부 불온도서로 지정됐었다. 당시 4·3특별취재반에 대한 감시도 엄청났다고 알고 있다. 뭔가 나올 때마다 관련된 사람들에게 전화가 가거나 협박 등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걸 묵묵히 이겨내고 4·3진상보고서와 특별법을 만드는 밑작업을 했다.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해왔다고 본다. 그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창간호에는 '바람타는 섬'이, 1주년에는 '제주인물론'에 대한 생각을 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제민일보가 4·3에 이어 제주해녀 장기 기획을 하고 있다. '바람 타는 섬'과 맞물린다.

그동안 지켜보면서 제민일보가 다 잘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잘못한 부분도 있고 반성해야 할 점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 한다.

신문에 '4·3'이 나온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 지난 역사와 비극에 대해 침묵하길 강요받기도 했지만 굳이 말할 생각도 없었던 지역 사회를 계몽했다. 취재반이 한국기자상을 받으며 지역 언론의 역할이나 탐사보도의 주춧돌을 놨다. 거기에 멈춘 것이 아니라 제주해녀를 10여년 넘게 취재해 그들의 삶을 활자로 남겼다. 두가지 모두 공동체의 이야기고, 지난한 과정을 견디고 만들어낸 공공선이다. 해녀항쟁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배경에도 공공 권익을 뺏기지 않고 사수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을 제대로 살피면 지금의 제주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두 작업을 제민일보가 했다. 잘했다.

-30살 제민일보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을 안다.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다만 창간 정신으로 진군하면서 사회정의를 지키고 구현하기 위한 좋은 여론을 형성하는 책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여론을 만드는 힘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정의로운 여론 조성을 위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정의 구현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 언론으로 자긍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30년이면 한 세대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이 자리를 잡고 다시 새로운 토 닦음을 하는 시기다. 스스로 새로워지는 면모를 보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제민일보 창간 30주년'이란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늙고 세상은 청년이 됐다. 그래서 막개발이 불편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 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것들이 안타깝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공감'이란 것을 먼저 생각한다. 제민일보도 역시 활자로 세상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유념했으면 한다.

-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소설을 살아온 작가라고 한다. 올해는 오페라 '순이삼촌'으로 제주와 한 몸이 됐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가.

등단할 때부터 순수문학을 꿈꿨었다.(웃음) 작가로서 4·3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냥 슬픔이 아니라 처절함이다. 말로 불편한 진실을 감당하기에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운명같다고 느낀다.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무당을 자처하고 있다. 글로 위령제를 올리는 기분이다. 계속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할 때까지 하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으로 사회구성원의 의무를 하고 있다. 제주 사람들도 각각 이런 생각으로 제주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제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환경을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나 선택을 하지 않게 된다. 사회가 품은 갈등은 밖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만든 것들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