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제주어육성보전위원·시인·논설위원

꽃이 상징하는 내용이 현실적인 쓰임새로 정착한 경우가 많다. 

진눈깨비 휘날리는 겨울, 쌀밥처럼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돌담 아래 수선화가 핀다. 꽃에 다가가서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아보면 고급향수 냄새가 난다. 수선화의 유래를 보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가 제 모습에 반하여 죽어 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꽃말은 '자존'이다. 꽃 모양은 은 접시에 금잔이 놓여있는 듯 아름답고 향기도 강하다. 

지난겨울에 한라산 둘레 길을 걷다가 동백꽃의 처연함을 보고는 동백꽃에 대한 시를 썼다. 백설이 쌓인 벌판에 송두리 째 누운 동백꽃의 붉은 색을 생리하는 여인으로 설정하고는 한라산이 봄을 낳으려는 몸부림이라는 은유로 '투신'이라는 꽃말을 대신했지만 이제 동백꽃은 4·3사건의 비극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들꽃이 핀다. 떠오르는 꽃으로는 할미꽃과 제비붓꽃이다. 서양은 대표적인 봄의 전령사로 튤립을 꼽는데 할미꽃과는 종이 달라도 모양새는 비슷하다. 튤립이 고개를 쳐들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꽃이라면 바람결에 등 오그리고 백발을 날리는 할미꽃은 시골 외할머니를 닮았다. 제비붓꽃을 보노라면 어찌하여 짙은 보라색인지 시심이 절로 나온다. 

5월에 들어서면 장미가 핀다. 장미는 향기가 거의 없는 대신 꽃잎의 감촉이나 빛깔은 붉은 립스틱을 짙게 칠한 여인의 입술을 닮았다. 꽃다발을 만들 때 장미의 농염을 돋보이게 하는 꽃은 안개꽃인데 두 꽃의 관심도가 대조적이다.

초여름이라 수국이 피고 있다. 수국 중에 산수국은 숲 속 호젓한 곳에 핀다고 제주어로는 '도채비고장'이라고 부른다. 도깨비를 부른다는 속설이 있어서 마당에 심지 말라는 뜻이 있건만 요즘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심는 추세다. 이것은 무덤을 지키는 '제주 동자석'을 밀반출하여 자기네 집 정원에 세우고 폼 잡는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배롱나무 또한 집에 심는 것이 아니라 산소에 심던 나무다. 조선 시대에는 왕궁에도 심지 못하는 나무였다. 유서 깊은 서원이나 정자, 사찰 등에 심는 나무다. 백일홍에는 목본이외에도 초본 백일홍도 있다.

오래 전에 서정주 시인이 쓴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국화는 소쩍새가 우는 봄부터 가을 서리까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인고로 갖은 풍상을 겪고 돌아온 한 중년 여성을 만나게 된다는 정서가 진한데 장례식에 향초를 대신하는 제물로 자리매김을 하는 바람에 사군자인 매란국죽梅蘭菊竹에서 국화의 위상이 약해진 느낌이 든다.  

가을 들녘을 수놓는 코스모스의 우리말은 '살사리꽃'이다.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양이 애잔하고 가냘파서 순정, 순결이 꽃말이다. 멕시코의 높은 산지에서 건너왔지만 살살이꽃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예쁜 이름이 표준말로 인정되지 않았다. 

죄 없는 벚꽃을 일본화라고 일제강점기에 당한 화풀이로 베어버린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피는 벚꽃이나 일본에서 피는 사쿠라나 겨울이 물러간 자리에 화들짝 피면 마을 전체를 딴 세상으로 만드는 풍경이 일품이지만 꽃잎이 약해 비바람에 쉽게 떨어지는 모습에 삶의 덧없음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무튼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 봉개동이다. 

죄 없이 미움 받는 꽃이 또 있다. 밤나무다. 여름이 오면 기부에 암꽃이 각각 따로 붙어 피며 특유한 향기를 풍긴다. 암수 꽃이 한 나무에 따로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밤의 효능이나 과일로, 꿀을 구하는 식물로도 쓰임새가 대단하다. 하지만 물컥물컥 뿜어내는 지독한 향기가 정액 냄새와 비슷하다고 하여 여자가 맡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화자 되는 꽃이기도 하다. 

어느 마을에 청상과부가 밤꽃 냄새를 맡고는 장터에서 딴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시아버지가 집안 망신을 견디다 못해서 마을 뒷산에 있는 밤나무를 몽땅 베어버렸다는 시가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육지에서 '구실잣밤나무'라고 부르는 '조밤나무'가 제주도 가로수로 한몫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녹나무가 많아지는 느낌이다.  

금년 봄엔 코로나 19 때문에 죄 없는 유채꽃을 사세부득이 관광객을 실망시키려고 트랙터로 갈아엎어버렸다. 내년 봄에 꽃구경오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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