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길을 걷다보면 담 너머 마당이 훤하게 보이는 집이 있다. 그런 집을 보면 자꾸 기웃거리게 된다.  사생활 보호니 뭐니 해도 시골집은 아무래도 마음 편하게 드나들어도 되는 집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떤 향수 같은 게 아닐는지. 예전의 친구 집이 그랬듯이 "누구야" 하며 신발 벗고 들어가도 될 같은 느낌이랄까. 

마당에는 풀들이 가득하고 대문은 없다. 집으로 들어가는 담장 입구에 우편물이 가득하다. 누가 집어갈 만한 우편물은 없고, 돈 내라는 우편물만 수북이 쌓여 있다. 전기요금 고지서며 외국에서 날아온 편지도 있다. 집 주인에게 온 것이라기보다는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 온 우편물이지 않을까. 해마다 이 집 앞을 지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비슷한 형상을 목격하게 된다. 어느 해인가는 외국인 노동자인 듯한 사람 서넛이 눈만 껌뻑껌뻑하며 마당 한 곁에 나른하게 둘러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제주의 시골 마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19 이후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예가 많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바싹 사람이 필요한데 외국인 노동자가 떠나면서 농촌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요즘은 양파, 마늘, 비트 수확 철이다. 드문드문 외국인 노동자들이 보인다. 장마가 지나고, 가을 당근파종이 까지는 한동안 일자리가 거의 없다. 

얼마 전, 인도에서 유학 온 지인에게 안부 전화를 했더니 코로나19 이후로 외출하기도 두렵다고 한다. 왠지 한국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치가 전염병 쳐다보듯 하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요?" 라고 반문했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의 의심스런 눈빛에도 위축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유학생 입장이라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고, 코로나19 이후로는 더더욱 거리에 나서기가 힘들다니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 막막하단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어 며칠 사는 맛 난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생존의 위협이 느껴지면 예민해지기 십상이다.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라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현실이 불안을 조장하고, 상대적으로 안전에의 욕구를 증폭시킨다. 안전과 안정,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좀 더 인색해지고 야박해지는 것이다. 뉴스에서 들리는 미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발생한 폭동사태 등을 보면 전염병으로 인한 불안은 죽음을 불사하는 구나 싶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마음의 시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눈앞에서 마지막 열차를 놓쳤다.
순간 지상의 모든 길들이 휘발된다. 칼에 베인 듯한 이 서늘한 메타포는 뭘까, 공포에 가까운 긴장으로 열리는 몸, 방전된 가랑이 속 번개가 내리친다. 수억만 개의 유성이 휘몰아친다. 나는 열리면서 동시에 해체된다 낯선 광장, 주머니 칼 잡히듯 펴지지 않는 몸, 살을 발라낸 뼈의 철로
꿈속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꼬이거나 솟아 있다
구름은 구름을 올라타고 흔들어대고 휘저어댄다 한 발자국도 집을 향해 진행하지 못한다. 어둠은 두께를 더하며 조여 온다. 다닥다닥 공격해오는 불가사리 그 붉은 별자리 나의 깊은 곳을 빨아댄다 번개가 가차 없이 내리친다. 나는 굴속을 후벼 파느라 손톱이 잘려나가고
불안은 오르가즘의 창고다. 번개는 불안을 공격한다 불안의 절정에서 난 오르가즘을 느낀다. 번개 맞은 동굴이 아득해진다. 불안은 불안을 지켜내는 중독성 강한 毒이면서 눈물이다. 불안의 힘이 나를 키운다. 이 보고서는 대필도 복사본은 더더욱 아닌 리얼리티다
나는 너를 주어진 시간 안에 풀어야 한다.
수억만 개의 별자리를 풀어야 하고 수억만 번 하늘과 땅이 열리고 닫힌다. 공격적인 종소리는 불안을 부추긴다. 나는 끝내 너를 풀지 못한 채 점 점 높이 가벼워진다 불안에서 꽃이 피는 기이한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번개는 종소리를 관통하고 종소리는 나의 깊은 곳에서 소리친다. 하늘이여! 바다여! 살쾡이여! (정운희 시 「불안에 관한 보고서」전문)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시력을 잃는 전염병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벌어지는 죽음의 사태를 그리고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 선정이유로 "상상력과 아이러니가 풍부한 이야기로 우리의 눈을 속이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르케스, 카프카, 보르헤스 등과 함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이야기하는 작가로 불리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동일제목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도시 한복판에 클렉션 소리가 심하게 울린다. 한 운전자가 차를 멈춰 세우고 한참을 지체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가 묻는다. 왜 그러냐고 묻자, 운전자는 "눈이 안 보여요."라고 말한다. 그 운전자를 필두로 도시에 실명 환자들이 늘고, 급기야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진단한다. 보건당국은 실명자들을 정신병원으로 쓰던 건물로 격리시키고, 격리된 자들은 한 공간에 갇혀 살게 된다.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고, 격리된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진다. 그리고 수용소 내에서는 생존을 위한 약탈, 강간, 살인이 일어난다. 도시는 시체와 쓰레기로 폐허가 되어간다. 뉴스에서 자주 목격되는 폭동사태는 현실이 된 것이다. 

빵을 얻기 위한 사투는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만 적나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 영화고, 영화가 현실이다. 전염병은 인간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부모형제도, 부부관계도 갈라놓는다. 하지만 수용소도 인간사회인지라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자연스레 형성되고, 빵을 담보로 한 폭력이 난무하다.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 남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다하더라도 인간 이성이 이렇게 무너질까 싶다.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이 생존 앞에서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유지하는 선한 이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기에 살아볼 만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슬픈 현실 말이다. 장맛비에 어제 심은 늙은 호박은 뿌리를 내리고, 그 외의 모든 불안이 말끔히 씻기어 버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물론 그 후의 무더위가 살짝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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