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근 아라요양병원장·논설위원

4년여 전,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영국에서 브렉시트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보며, 이 두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맨 처음에 거론되는 것이 국민소득이고 그 외로 문맹률이나 대학 진학률, 영아사망률, 자원봉사 참가율, 과학이나 문화 예술의 발달 정도 등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가 얼마나 잘 갖춰져 있으며 제대로 운영되고 있나 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필자는 민주주의 국가가 올바로 지탱되기 위해서는 법의 형평성과 과세의 공평성이 갖춰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나 선진국이 되기에는 아직 얼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위상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88올림픽과 2002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삼성 등 세계적 기업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고, 조수미, 비, 방탄소년단 등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더니 드디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석권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2020년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사태로 우리나라의 저력이 드디어 전 지구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대구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였으나 중국과 달리 지역봉쇄라는 강압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감염이 퍼지는 것을 효율적으로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 사재기나 약탈과 같은 부작용도 발생하지 않았다. 초기에 마스크 대란과 같은 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빠른 시간에 극복하였고, 드라이브 쯔루 등과 같은 획기적 방법을 창안하여 검사를 대대적으로 안전하게 실시하였다. 그 사이 개발한 검사 시약이 100여 개국 이상으로 수출되고, 6. 25 전쟁 때 참전한 국가나 장병들에게 마스크를 무상으로 공급하여 우리의 도덕성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조국 사태에 이어 금년에 윤미향 사태를 접하면서 과연 우리의 의식 수준의 선진국에 합당할 정도로 높아졌는가 하는데 대해 의구심이 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상황을 알아볼 겸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서인이던 정사 황윤길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자 동인이던 부사 김성일이 반대 진영의 주장을 그대로 수긍할 수 없어서 그럴 위험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가 소홀하여 온 백성들이 참혹한 전화(戰禍)를 겪었었는데, 이번에도 반대 진영이 주장하면 무조건 거부하는 양상을 보면서, 아직 우리의 의식구조는 이조 중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우리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를 진영의 논리로 접근하니 이런 사단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정도언 서울대명예교수의 지적처럼 '인권운동에서 인권이 본(本)이고 운동은 말(末)입니다. 운동이 인권을 뒤집으면 이미 인권운동이 아닙니다. 운동의 이름으로 인권을 뒤집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인권운동가는 아닌 것입니다.' 즉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윤미향 씨의 30년 활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본말이 전도된 잘못을 눈감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였다고 6. 25 전쟁 중 백선엽 장군의 공을 무시하고 충혼묘지에 안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시면서 윤미향 씨에 대해서는 공을 생각하라고 얘기하는 분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누구나 공(功)이 있으면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 공이 과를 누를 정도면 과를 감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과만 들춰내 비난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법과 제도 위에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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