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황 할아버지의 눈물

13일 재심청구사건 법정 출석 4·3 당시 상황 직접 진술
영문도 모른 채 경찰 체포…폭행·협박 겪고 형무소 수감

4·3 당시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옥살이를 해야 했던 김두황 할아버지(92)가 72년 만에 법정에 섰다. 평생 가슴 속 한으로 남아 있던 응어리를 풀고자 재심을 청구한 김 할아버지는 13일 법정에 직접 출석, 불법 체포와 구금 과정을 상세히 진술했다. 그간 말 못했던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죽기 전에 명예회복을 시켜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하기도 했다.

△불법 체포후 폭행·협박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13일 오전 201호 법정에서 김 할아버지가 출석한 가운데 4·3 일반재판 재심청구사건에 대한 2차 심문을 진행했다.

김 할아버지는 이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법정에 직접 출석해 1948년 당시 불법 체포 및 구금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김 할아버지는 “출생후 남제주군 난산리에서 지내던 중 1948년 소개령이 내려졌다”며 “이에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민보단을 구성했고, 저는 사무 보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어느 날 민보단장 등 8명이 전부 잡혀 갔고, 얼마 뒤 경찰 2명이 난산초등학교 관사에 있던 저를 끌고 갔다”며 “그때가 11월 중순쯤”이라고 했다.

그는 “체포영장도 없었고, 포승줄에 묶여서 성산포경찰서로 끌려갔다”며 “취조실에서 남로당 가입 등을 묻는 경찰 질문에 모른다고 답하자 소나무 장작으로 어깨와 무릎, 허벅지 등을 폭행했다”고 밝혔다.

또 “지속적인 폭행으로 두 번 기절을 했고, 그때마다 물을 끼얹는 등 고문이 이어졌다”며 “심지어 뒷문으로 끌고 간 후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총으로 위협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이틀 정도 조사를 받은 뒤 제주시 경찰서로 갔고, 3개월 정도 구금됐다”고 말했다.

불법 체포는 물론 조사 과정에 모진 고문과 협박이 있었다는 것이 김 할아버지의 진술이다.

△죄명·형량도 모른 채 수감

김 할아버지는 재판과정에 대한 위법성도 강조했다.

그는 “경찰서에서 굴비 엮듯이 데리고 갔다. 재판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도 몰랐고, 설명도 없었다”며 “형량이나 죄명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 이후 유치장에서 열흘 정도 있다가 고깃배를 타고 끌려갔는데, 나중에 그곳이 목포형무소란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곳에서도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받은 사실을 알지 못했고, 목수 일을 하면서 지냈다”며 “1년이 지나지 않아 출소한 후 간수 집에서 일을 하다가 6·25 전쟁 전에 제주로 오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누명을 풀 방법이 없었다”며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마음이 좀 시원하다”고 밝혔다.

그는 “죽기 전에 가슴 속 응어리를 풀 수 있게 명예회복을 시켜줬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부에 호소했다.

김 할아버지의 딸도 법정에서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죄를 풀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법적 구제를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고 밝혔고, 재판부는 이날 심문을 종결했다.

김 할아버지가 이번 재심청구를 통해 억울한 누명을 풀고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경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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