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 돈키호테북스 대표

2017년 늦여름에 서귀포 혁신도시에서 서귀포 시내 방향으로 한 블록 떨어진 외진 곳에 동네책방을 열었다. 부근에 서호초등학교와 건물이 몇 채 있을 뿐 귤밭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우리 가게 외에는 상점도 없다. 이문 없는 콧구멍만한 책방이지만 덕분에 이것저것 가리는 것 없이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2019년 가을 우당도서관 '제주독서대전'에 동네책방 부스로 참여했다. 비가 와서 원래 계획한 야외부스에 나가지 못하고 우당도서관 로비에 옹기종기 모였다. 여러 책방이며 체험 부스들이 자리 배치부터 우왕좌왕하다가 간신히 책을 적당히 펼치고 한숨 돌렸을 때 엄마, 아빠, 아이 둘로 보이는 일행이 빠른 걸음으로 부스 사이를 가로질렀다. 열 두어 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우리 책방 '돈키호테북스'의 책이 늘어선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관심을 보이는 순간, 뒤따르던 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책은 빌려보는 거야!" 입에서 '아버님!'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뒤이을 말을 찾지도 못하는 사이 가족은 도서관 열람실을 향한 계단으로 멀어졌다. 아이도 아버지도 그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조차 않았다.

잠깐 걸음을 늦춘 것, 잠깐 고개를 돌린 것이 다였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책은 빌려서 보는 거라면 책을 파는 책방은 왜 있는 걸까? 아이가 책을 좀 구경한다고 책을 바로 사야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 아빠는 어째서 구경도 못하게 하는 걸까? 아이는 둘째 치고 아이 아빠 자신은 생소한 책방이 들고 나온 책이 궁금하지 않은 걸까? 아이 엄마는? 책을 보려고 도서관에 오는 길인 건 맞겠지? 그런데 알지 못하는, 아직 만나지 못한 책이 궁금하지 않다고? 

꼬리를 무는 질문은 돈과 책, 책과 살림살이의 관계로 모아졌다. 책방을 열기 전에는 나도 알뜰한 소비자였다. 책은 할인과 적립이 가능한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샀다. 그랬던 내가 이제 와서 책방을 운영한다고 '여러분 모두 내 책방에 와서 책을 사세요, 더 싼 곳에서 사지 마세요!'라고 강변할 수도 없다. 왜 '돈키호테북스'에서 책을 사야 할까? 내가 망하지 않으면, 우리 동네에 책방이 있으면 여러분은 뭐가 좋은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주시에 있던 시 전문 책방 '시옷서점'이 올해 초 돈키호테북스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이사 왔다. 두 주인장 중 한 분인 김신숙 시인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특유의 빠른 말투로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셨다. 김 시인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서귀포 일호광장 부근에 해직교사가 운영하는 서점이 있어서 담임 선생님이 데려가 주셨다고 한다. 문방구와 서점을 겸한 그곳을 이후로 몇 번 방문했는데 나이가 어려서 책을 산다기 보다는 구경을 주로 했다고. 서점은 일 년 남짓 운영하고 문을 닫았는데 김 시인은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초등학교 앞에 있는 돈키호테북스가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덕담을 주셨다. 눈물 나게 고마운 말이었다.

책은 다루는 범위가 넓다. 돈키호테북스를 예로 들자면 종교, 문학, 인터뷰집, 사진집, 만화책, 페미니즘, 그림책, 요리책, 수공예, 청소년용 책 등이 있다. 언어, 뇌과학, 장애, 글쓰기, 서점에 관한 책이 있고, 신간과 구간, 헌책과 새책이 모두 있다. 한 마디로 중구난방이다. 콧구멍만한 책방이라면서 이렇게 다양하다. 작은 책방이 이 정도인데 세상에는 책이 얼마나 많을까? 그래서 작은 책방은 유명세를 얻지 못한 책들이 시간을 거슬러 유통되는 곳이다. 인간은 다면적이고 그래서 여러 면을 비춰 줄 거울이 필요하다. 책은 우리를 비춰주는 가장 친절한 거울이다.

베스트셀러는 우리 각자의 다면을 비춰주기엔 부족하다. 작은 책방에서 인생을 비춰 줄 책을 만나기를, 발견하기를,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구입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책 읽을 시간을 주지 않는 세상에 저항하기를, 생각하기를 허락지 않는 세태에 맞서기를 권한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다. 생각하지 않고 달리기만 하기에는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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