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에 빠지다

사진=양경만씨 제공

기록적 폭염 속 뜨거운 한낮 대신 '한밤' 들썩
달뜬 더위를 대신한 잔잔한 '추억 만들기'홀릭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밤코넹이·베아티투도

아재 개그까지는 아니지만 여름이 왜 '썸머(SUMMER)'냐 물었더니 여름과 밤이 만나 '썸'을 타기 때문이라 했다는 우스개가 있다.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낮을 두고 굳이 밤과 '썸'을 탈까.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무더운 밤 잠은 오지 않고/이런저런 생각에 불러 본 너/나올 줄 몰랐어/간지러운 바람 웃고 있는 우리/밤하늘에 별 취한 듯한 너/시원한 Beer Cheers/바랄 게 뭐 더 있어". 여름이면 꼬리표처럼 등장하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살벌 달콤하기 때문이다.

한여름밤의 꿀

달콤하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항의가 쏟아진다. 더워서 잠도 못자는 데 뭐가 그리 좋아 웃느냐 묻는다. 솔직히 딱히 마땅한 대답은 없지만 너무 더워 너나 할 것 없이 '셀프 감금'을 선택하는 상황을 달콤하다 해석하지 않으면 여름나기는 고역일 수밖에 없다.

'폭염경보'가 안부 인사처럼 쏟아지는 사정에 역대급 더위와 한낮 '맞짱'을 뜨는 것은 젊은 객기라도 피하고 싶은 일이다.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는데 모래밭이 뜨거워 구경만 했다는 얘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도 여름이다. 뭔가 저릿하고 짜릿한 것이 절실하다.

다행히 겸손이란 말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찬란한 일몰을 지나며 여름도 숨을 돌린다. 마치 리셋 버튼을 누르듯 해가 지면 살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진다.

꿈보다 좋은 것이, 꿈은 눈을 감았다 뜨면 깨지만 이 것 만큼은 영원히 가슴에 남는다.

심지어 저절로 훅 하고 달아오르는 전희는 덤이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운 시시각각 색다른 환상 일몰이 '쨍'하고 시작을 알리고, 지는 해를 벗 삼아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한 바다가 서슴없이 몸을 허락한다. 그렇게 한여름밤은 '꿀'이 된다.

마법같은 순간

이 모든 것은 어느 순간 '동경'이 됐다. 모 예능프로그램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는 중산간 어느 연예인의 집도 마찬가지다. 집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서 펼쳐졌던 것들에 홀린 것이다.

몇 번이고 돌려보며 느낀 것이지만 그 공간의 한낮은 느슨하다 못해 지루하다. 꼭 집어 '여름'만은 아니지만 하루가 멀다고 올라가는 수은주에는 장사가 없다. 각자 원하는 만큼, 미리 정해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진짜는 해가 지고 난 뒤 부터다. 모닥불 연기 때문에 별이 제대로 안 보이는 게 서운하고,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 시계바늘이 야속하다.

달빛에 취한 탓인지 눈을 마주하는 것도, 고민 이상이던 속 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귀를 열고, 또 가슴을 열고 듣고 또 얘기한다. 진수성찬 근처에도 못 가는 소박한 밥상도,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반찬까지도 진짜 '꿀 맛'이다. 알지 모르지만 이 것이 여름밤의 마법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뗐던 '기차놀이'에 입이 찢어져라 웃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얼굴 알려진 누가 있어서나, 뭔가 있음직 해 보이는 공간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반짝이는 마술봉을 휘두르는 달빛 천사 때문이라면 모를까.

행복은 마음에 달렸다

'밤 마실'이라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흉흉한 일이 많았다. '묻지마'폭력이나 데이트 폭행 같은 말이 일상용어처럼 쓰인다. 요즘 말로 '이게 실화'다. 그렇다고 이런 달콤한 것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밤코넹이(밤고양이)'처럼 싸돌아다니는 일은 혼자도 즐겁고, 여럿이면 더 즐겁다. 밤이 되면 슬그머니 네온사인 뒤로 숨었던 적이 있었다. 인간관계를 핑계 삼았지만 딱히 이유는 없었다. 여름, 밤도 마찬가지다. 너무 환하면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두워도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누군가의 피곤하고 지친 모습을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에 지쳐 있구나'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처럼, "힘들겠구나"하는 위로 한마디가 지쳐 생긴 상처에 새살 돋는 연고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에 몸을 맡기면 된다. '베아티투도(Beatitudo)'.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처럼 여름밤의 맛도 내가 만들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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