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글자 옮겨 쓰다 제풀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이만큼 넉넉하라는, 추석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아버지'인가 싶다.

"바쁜 사람들도/굳센 사람들도/바람과 같던 사람들도/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 이 계절에는 가시처럼 가슴 끝에 콕콕 박힌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고,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행여 발밑이 미끄러울까 낙엽을 줍는. 바깥은 요란해도 울타리를 자처하고 "양심(良心)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중). 그 이름이 아버지다.

부시럭 소리가 귀에 밟히는 아버지란 이름이 추석을 품는다.

새로움에 겨워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던 봄이 가고, 헉헉 숨소리에 절로 놀라 자기만 추스르던 여름을 보내고 나니 더 그렇다. 

그래서 올 추석 인사로 "힘내세요"를 고른다. '올해는 뭐든 해보자' 힘내 보는 설과 달리 이번 명절은 여기 저기 힘들다, 어렵다는 얘기가 잔뜩 이다.

나아질 줄 모르는 고용지표에, 골목이며 전통시장이며 심지어 사정 좀 낫다는 대형마트까지 예년만 못하다고 하소연이다. 사람 몇 모이면 "살 만 하냐"는 안부를 나눠야 하는 사정이 추석일리는 없다. '힘내라'는 말이 희망고문이라 해도 변명 거리는 충분하다. 절대 할 수 있다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같이 해보자는 격려의 어감은 분명 다르다. 휘영청 둥근 달에 달큰하게 취해 일확천금, 꿈같은 미래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 달빛에 비치어 생기는 그림자에 더 많은 몫을 할애한다. 그러니 내 손 안에 쥘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소중해진다. 아버지의 세상은 달 그림자 안에 있다.

돌이켜 보면 널찍한 등을 보면서 고맙다는 마음은 뒷전이고 늘 넘어설 생각이 먼저였다. 내 생각과 달리 정해진 틀이나 뜻 같은 것은 거스르거나 맞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미숙하고 치기 어렸던 시절의 일이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누군가가 치열하게 살았던 '오늘'을 밟고 서는 일이다.

빤한 얘기지만 멈출 줄 모르고,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행복은 없는 존재다. 사실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돌아보면 늘상 그 곳에 서 있는, 힘들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슬그머니 빌려주는 어깨가 든든하다.

그러니 추석에 아버지라는 다른 이름은 퍽퍽하고 정신없던 일상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둘렀던 굳은살을 용케 비집고 나온 '살 맛'이다. 그러니 이번 추석에는 너도 나도 '아버지'가 될 일이다. 크던 작던 자신의 역할을 찾고, 누군가의 뒤를 지키며 손을 내밀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깊고 짙은 그늘이면 좋겠지만 폭염 한 복판에서는 잠깐 땀을 식힐 수 있는 손바닥 그늘도 감사하다. 그 고마움을, 그 역할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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