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화가·논설위원

어린 시절 크레파스에는 '살색'이라는 게 있어서 사람 얼굴과 손 등 노출된 피부색은 '살색' 하나로 통용되던 때가 있었다. 고학년이 되어 수채 물감을 사용할 적에도 '살색' 물감이 없을 경우에는 흰색과 빨강, 노란색을 적절히 섞어 크레파스의 '살색'과 근접하게 만들어야 제대로 된 살색이 되는 것 같았다. 밭에서 일을 하는 농부의 얼굴과 아장아장 걷는 어린 아기의 얼굴과 예쁘게 화장한 신부의 얼굴색은 모두가 '살색'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2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특정 색을 '살색'으로 명명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색상 이름을 변경할 것을 기술표준원에 권고했다. 그렇게 해서 '살색'이라는 명칭은 2005년에 살구색으로 바뀌었고 비로소 아이들도 사람의 피부 색을 '살색'이 아니라 스스로 관찰 한 바 대로 선택하여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인권위원회가 출범한 초기에 나왔던 사례이기도 하고, 색깔의 명칭 하나로도 인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경험이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미국에서 1954년에 흑백분리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흑인 '시민권' 쟁취 운동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인권운동의 영향으로 1960년대에 색상 이름이었던 Flesh(살, 피부)가 Peach(복숭아)로 바뀐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흰색, 검정색, 살구색의 크레용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모두 살색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공익광고 포스터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 인권위원회의 결정에 앞서 미국의 선례가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피부색을 가지고 차별하지 말자는 목소리는 그 후로도 60년 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으나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한 이후에도 미국 내의 흑백 갈등은 지속되었다. 미국의 뿌리깊은 흑백갈등이 최근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코로나의 상황과 전세계 네트워크 환경이 맞물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포츠 스타들도 동참하면서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로 이어지고 있다. 서구, 백인 중심의 세계에서 흑색뿐만 아니라 갈색, 노란색 소위 그들이 정해놓은 유색인종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차별받는 것이 내재화되었다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도 서구에 가면 알게 모르게 차별을 경험했다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우리 역시 우리보다 좀 더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피부의 색으로 나뉘는 차별은 단지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만이 아니라 현재진행중인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이 자기들과 다른 색이면 편견과 차별에 노출시키는 우리 안의 인종차별문화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면 어떨까 싶다. 

빛은 무지개색을 지니고 있으면서 물체에 닿아 빨강을 반사하면 빨강으로 보이고 파랑을 반사하면 파랑으로 보이는 것이다. 피부색이 저마다 다른 이유는 빛이 반사되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고 이는 저마다 다른 생각과 성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살색' 하나만 있던 시절에는 사람의 피부를 다양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살색'이 없어진 지 15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피부색의 표현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생각이나 취향이 많이 다양해졌는데, 생각이 다양해지는 만큼 타인의 생각이나 취향도 존중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지개색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갯빛 안에서 다양한 피부의 색이 나오고 빨간 장미가 되고 노란 개나리가 되고 파란 하늘이 되는 것이다. 빨간 장미와 분홍 장미와 흰 장미가 서로 차별하며 다투지 않듯 보이는 색은 서로 다를지라도 소통을 통해 조화롭게 맞추어 간다면 보다 다채로운 사회가 될 것이고 이런 사회를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하는 것 아닐까?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